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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by 최승우

2000s 선우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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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10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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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정아 같은 뮤지션은 또 없다. 그녀는 완성도 높은 앨범을 만들어낸 싱어송라이터인 동시에, 작곡가, 프로듀서, 매체 음악가 등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전방위로 드러내고 있다.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역동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는 멀티 플레이어 음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로 한정하면,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린 특정 뮤지션의 이름은 아마도 선우정아일 것이다. 메이저와 인디를 넘나들며, 장르와 영역을 가리지 않는 폭넓은 스펙트럼에, 탁월한 라이브 실력을 갖추고, 대중적 인기까지 거머쥔 뮤지션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절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만큼 선우정아가 보여주고 있는 활약상은 흔한 말로 독보적이다.

H.O.T와 서태지를 좋아했던 소녀

 

선우정아는 1985년 5월 11일 경기도 광주 출생이다. 당시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어머니는 그녀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선우정아는 유별날 정도로 피아노를 좋아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악보를 동화책 읽듯 들여다보고, 그게 건반 위에서 소리로 구현되는 순간은 너무 황홀했다. 선우정아는 “피아노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오늘도 피아노랑 얘기했어!’라고 말하곤 했다”고 돌아봤다.

선우정아가 처음으로 작곡을 한 것은 초등학교 때다. 물론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장난 수준’으로 만들었다. 남들에게 들려줄 만한 정도의 곡이 나온 건 고등학교 즈음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내가 내 노래를 들어봐도 구렸다. 나 스스로 빠져서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디 프로그램도 일찌감치 배웠다. 아버지가 “요즘은 컴퓨터로 음악 만든다며?”라며 작곡 소프트웨어 ‘케이크워크(Cakewalk)’를 사주셨다. 딸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 걸 보고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는 물어볼 곳이 마땅치 않아서 PC통신을 뒤져가며 미디를 독학했다.

 

십 대 시절에는 ‘빠순이’였다. H.O.T의 열성적인 팬이 되어 팬클럽 활동을 하고, 머리도 문희준처럼 ‘칼단발’을 하고 다녔다. 학교 댄스부도 가입했다. 선우정아는 그 시절에 대해 “좋은 영향도 많이 받았다. 대중성, 서양의 좋은 것을 발 빠르게 따라가는 사운드 같은 걸 많이 배웠다. 팬 문화에 대해서도 빠삭해졌다”고 말했다.

 

그 뒤 선우정아가 꽂힌 것은 록이었다. 고2 때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를 듣고 굵직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비슷한 장르의 음악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콘(Korn)과 림프 비즈킷(Limp Bizkit), 슬립낫(Slipnot),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등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무서운 선배들에게 맞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댄스부를 탈퇴하고, 친구들을 꼬셔서 스쿨밴드를 만들기도 했다. 자신이 만든 곡들을 실제로 연주해 보고 싶어서다. 그녀는 “그때는 내가 뭘 안다고 애들한테 악기 가르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회상했다.

 

재즈를 접하고 세상이 뒤집히다

 

선우정아가 실용음악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 것은 고3 때다. 그 시절만 해도 실용음이라는 게 낯설었던 탓이다. 그녀는 실용음악과로 진로를 정하고 동아방송대학교(영상음악계열)에 입학했다. 이는 선우정아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오는 계기가 됐는데, 국내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이다.

 

H.O.T가 해체한 뒤에 한참 록에 미쳤던 시절이라 여기저기에 피어싱을 잔뜩 달고 학교에 간 그녀는 말로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선우정아는 “재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그냥 멋있어 보여서 배웠는데, 교수님 노래를 듣고 세상이 뒤집혔다”고 말했다. 게다가 스윙 리듬을 타는 재즈의 창법이 그녀의 목에 더 잘 맞았고, 노래하기도 전보다 수월해졌다.

선배들을 따라서 무대에 오르게 된 것도 값진 경험이었다. 2006년부터 트롬본 연주자 이한진이 이끄는 정통 재즈 밴드 러쉬 라이프(Lush Life)의 멤버로 3년 동안 재즈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이 시기는 보컬뿐 아니라 악기 간의 밸런스 등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 스무 살 이전에는 소심하고 완벽주의 기질이 심했는데, 재즈를 하면서 일상에서도 즉흥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선우정아는 “나한테는 재즈 클럽이 대학원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표현했다.

YG 엔터테인먼트와의 인연

 

선우정아의 공식적인 솔로 데뷔 앨범은 2006년 1집 [Masstige]다. 당시 그녀는 록 밴드를 꾸려서 활동하던 중에 1집을 발매한 회사와 인연을 맺었는데, 회사에서 밴드를 반대해서 혼자 앨범을 냈다.

 

선우정아는 1집의 12곡 중 9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온전히 자신의 색깔로 프로듀스를 한 앨범은 아니었고, 주목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녀는 1집에 대해 “그 당시에는 편곡을 할 능력이 없었다. 내가 만든 걸로 다 채울 게 아니라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아는 게 많아야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뒤로 편곡과 미디 등의 공부에 더 매진했다고 한다.

선우정아라는 이름이 미디어에서 본격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YG 엔터테인먼트와의 작업을 통해서다. 1집 이후 선우정아는 각종 재즈 행사와 라이브 클럽 공연에 집중했는데, 그녀가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재즈로 편곡해 부른 영상이 유명해지면서 YG 엔터테인먼트 관계자의 눈에 띄었다. 당시 YG 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가 영상을 보고 “이 친구에게 리메이크하라고 하면 재미있겠다”고 했고, 이는 투애니원(2NE1)의 ‘I Don’t Care’의 레게 버전 리메이크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런 인연으로 선우정아는 투애니원과 GD,     이하이 등 YG 엔터테인먼트 뮤지션들의 음악에 작곡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투애니원의 ‘아파(Slow)’, 이하이의 ‘짝사랑’ 등이 그녀의 작품이다. 이 때문에 선우정아가 YG 엔터테인먼트 소속 뮤지션이라거나, 혹은 그곳에서 데뷔한다고 세간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선우정아는 “YG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적은 없고, 계약 이야기를 한 적도 없다. 가볍게 음악 이야기를 하고, 내 음악을 들으면서 모니터링을 해주시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성공적인 두 번째 앨범, 그리고 전성기의 시작

 

선우정아가 싱어송라이터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2013년 2집 [It's Okay, Dear]를 통해서다. 1집의 실패 후 차근차근 역량을 쌓아서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었다. 그녀는 두 번째 앨범 발표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 이유에 대해 “애매한 것은 넣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1집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확실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만 넣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앨범 재킷에 세미누드 사진도 넣었다. “내 치부, 걱정, 찌질함, 열등감 같은 걸 모두 있는 그대로 까발리고 싶어서”다.

2집에서 선우정아는 프로듀서, 작곡가, 연주자, 보컬리스트 역할까지 소화하며 본인의 말대로 ‘자신의 것’으로 꽉꽉 채웠다. 재즈, 블루스, 팝, 알엔비 등의 폭넓은 음악을 다면체처럼 넘나들며, 음악인에게 필요한 모든 역량을 아낌없이 선보인 이 앨범으로 그녀는 단숨에 주목받는 뮤지션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제11회 한국대중음악상 음악상에서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팝(음반) 부문을 수상하며 2관왕을 차지했다.

 

선우정아는 “이십 대 내내 창작을 하고 공연 활동을 했지만, 공연하러 클럽에 가면 관객이 한 명도 없어서 공연을 못할 때도 많았다. 한 시간 반 연주해도 페이는 7만 원이었다. 그런 시기가 좀 길었다”며 “상을 받은 것도 좋지만, 내 활동을 알고 있던 동료 뮤지션들의 박수와 응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방송에서 말한 바 있다.

 

그 뒤 선우정아는 음악계에서 말 그대로 정신없이 불려 다니는, 어느 누구보다도 바쁜 뮤지션이 되었다. 아이유, 현아, 이문세, 박정현, 토이, 윤석철 트리오, 에피톤 프로젝트, 카프카, 이선희 등 많은 뮤지션과 피처링이나 콜라보, 또는 프로듀서로 협업을 했다. 러쉬 라이프의 첫 앨범에도 참여했고, 재즈 피아니스트 염신혜와 프로젝트 듀오 리아노폼(Riano Poom)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러 드라마와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배우가 되어 직접 연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선우정아는 자신의 작업에서도 결과물을 꾸준하게 내놓았다. 특히 2015년 발표한 싱글 ‘봄처녀’는 홍난파의 가곡을 모티브로 만든 댄스 팝으로, 그녀가 뚜렷한 개성을 가진 아티스트인 동시에, 중독성 강하고 힙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대중음악 작곡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한 곡이다. 선우정아는 ‘봄처녀’에 대해 “그전까지는 가내수공업이었다면 이번에는 돈 좀 들이고 스타일링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9년 선우정아는 다시 6년 만에 세 번째 정규 앨범 [Serenade]을 선보였다. 무려 16곡이 수록된 이 앨범에는 흑인음악을 바탕으로, 2집과 마찬가지로 재즈와 팝,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소스가 담겼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좀 더 간결하고 단단하게 정제된 흐름을 유지하면서, 프로듀서로서 한 단계 더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선우정아는 3집에 대해 “2집은 나를 꽉꽉 우겨넣은 앨범이었다. 아무리 내 의도가 확실해도 조금 열어놓을 필요도 있다는 걸 알았다”고 설명했다. 3집은 그해 한국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으로 선정됐다.

“듣는 순간에도, 들은 뒤에도 선명한 음악을 하고 싶다.”

 

선우정아는 “뮤지션으로서 큰 이상이 뷔욕(Björk)이라면, 현실적인 이상은 노라 존스(Norah Jones)”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는 뷔욕처럼 확고한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도, 노라 존스처럼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친화력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우정아가 클럽 공연을 하던 시절부터 연극적인 요소를 공연에 가미하는 걸 즐기는 이유도 이런 지론과 맞닿아 있다. 관객들이 좀 더 직접적으로 자신과 공감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녀는 “뮤지컬은 감정이 판타지적으로 과장되고 두루뭉술하게 전달되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맞닿는 연극이 좋다”고 한다.

 

그 말대로 선우정아는 매번 독특한 콘셉트를 연출하는 연극적인 무대로도 줄곧 화제를 몰고 다녔다.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테마를 표현하기 위해 등에 얼굴을 그리고 노래하는가 하면, ‘나와 내가 콜라보레이션을 한다’는 의미로 무대 양쪽에 거울을 두기도 했다. 5일 동안 같은 레퍼토리로 공연하면서 매일 악기 편성을 바꾼 적도 있다. 또 고등학교 후배이자 절친한 음악 동료인 바버렛츠의 리더 안신애와 함께 하는 소규모 어쿠스틱 공연에서는 완전히 다른 생생한 에너지를 뿜어내기도 한다.

 

선우정아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석이 너무 여러 개라 갈피를 잡기 힘든 음악이 아닌, 듣는 사람이 맥락을 명징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이 좋다. 듣는 순간에도 선명하고, 듣고 나서도 여전히 그 음악의 흔적이 남는 음악이다.” 이런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야말로 자신의 음악적 본질이라는 걸, 그녀는 지금까지의 다채로운 활동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출처=선우정아 인스타그램]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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