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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by 최승우

1990s 언니네 이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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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17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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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중반, 홍대 앞의 라이브 클럽들을 중심으로 인디 신이 형성됐다. 언니네 이발관은 이 시기에 등장한 뮤지션 중에서도 가장 독자적인 흔적을 남긴 밴드 중 하나다. 우울이 묻어나는 정서, 그와 정반대의 경쾌한 사운드는 영미권 밴드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고, 충성도 높은 고정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거짓말로 탄생한 밴드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의 캐릭터는, ‘인디 1세대 모던 록 밴드’라는 흔한 한 줄로 설명되기에는 아주 독특하다. 특히 음악뿐만 아니라 밴드의 역사가 이들 만큼이나 드라마틱한 경우도 드물다. 어쩌면 이들이 공식적으로 활동을 마감한 과거형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언니네 이발관의 시작은 199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즈음 이석원은 음반점을 운영하면서 PC통신 음악모임에 글을 올리던 20대 청년이었다.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세 누나 덕분에 자연스럽게 팝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고, 그중에서도 멜로디가 좋은 음악에 유독 꽂혔다고 한다.

 

1990년대 초중반의 PC통신은 지금의 인터넷 생태계와는 다르게, 각자 예리한 감식안을 자랑하는 마니아들이 글발을 휘날리던 곳이었고, 이석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종종 그들은 그야말로 피와 살이 날리는 혈전을 온라인에서 펼치며 음반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곤 했다. 당시 넥스트(N.EX.T)로 활동하던 신해철은 생전에 “PC 통신에서 나를 씹은 사람 중 가장 악랄한 이빨을 자랑한 사람이 이석원 군”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 즈음 이석원은 PC통신에서 자신이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의 리더라고 자칭했는데, 사실 이런 밴드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는 그때까지 제대로 악기를 잡아본 적도 없었다. 당시 PC통신에는 노이즈가든의 윤병주,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와 윤준호 등 실제 뮤지션이 여럿 있었기에, 그들에게 꿇리고 싶지 않았던 이석원은 일종의 기믹(gimmick)을 만들어냈던 셈이다. 그는 이때 허풍을 친 이유에 대해 “자신을 격상시키기 위한 일종의 술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1994년 어느 날 이석원은 KBS의 라디오 프로그램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출연, 음악을 소개할 기회를 얻게 된다. 실체가 없는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가 방송을 통해 알려져 버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석원은 진짜로 밴드를 만들어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윤병주 등 뮤지션 친구들도 한번 해보라고 적극 권유했다. 당시 윤병주는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기타리스트였는데, 그가 이끄는 노이즈가든이 1994년 가을 제1회 톰보이 록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도 이석원에게 동기가 됐다.

 

그 뒤 건반을 칠 줄 모르는 류한길이 건반 연주자로 합류하고, 마찬가지로 베이스를 칠 줄 모르는 음악동호회의 운영자 류기덕이 베이시스트로 들어왔다. 그나마 드러머 유철상이 6개월 정도 연주를 해본 적이 있는 경력자였다. 이석원은 “어떻게든 일이 이루어지는 운명이나 상황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멤버들이 찾아왔다. 나는 그때 기타도 전혀 칠 줄 몰랐는데, 친구들이 격려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결국 있지도 않은 밴드를 실제로 탄생시킨 그들은 윤병주에게 특훈을 받으며 1995년 2월 압구정동의 스튜디오에서 첫 합주를 했다. 이석원은 첫 합주에 대해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마냥 즐겁기만 했다. 어쩌면 음악을 하면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기억”이라고 돌아봤다.

 

1995년 이석원은 일 년 만에 다시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출연했다. 이번에는 윤병주의 도움으로 밤샘 작업을 하며 만든 자작곡들과 함께였다. ‘로랜드 고릴라’, 그리고 1집에는 ‘우스운 오후’로 수록된 ‘Funny Afternoon’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다. 방송이 나간 뒤 반응은 예상 이상이었다. PC통신의 음악 관련 게시판마다 “언니네 이발관이 대체 누구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이후 원년 멤버 류한길이 탈퇴하고, 방송에서 음악을 듣고 찾아온 정대욱이 기타리스트로 가세하면서 라인업이 재편됐다. 그러나 모두 전업 뮤지션이 아닌 탓에 밴드의 활동이 탄력을 받는 게 쉽지 않았고, 이들은 뭔가 의미를 부여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연을 준비했다. 같은 해 7월 언니네 이발관은 홍대 앞의 라이브클럽 드럭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가졌다. 약 25평 규모의 드럭이 사람으로 미어터질 만큼 언니네 이발관의 이름은 유명해져 있었다.

 

당시 홍대 인근의 라이브클럽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은 해외 음악을 커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작곡은 앨범을 내기 위해 만드는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헤비메탈이나 펑크처럼 강맹한 음악이 인디 신의 주류였다. 그런 시기에 비록 기술적으로는 한참 부족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그것도 경쾌하면서도 쓸쓸한 팝을 내세운 언니네 이발관은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즈음 윤도현이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록 밴드 합동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다들 테크닉은 탁월했지만 외국 곡만 들입다 연주했다. 정작 제일 좋았던 건 진짜 못한 언니네 이발관이었다. 그들은 자기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첫 공연의 성공에 고무된 언니네 이발관은 1996년 그동안 만든 자작곡들을 추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고, 몇몇 기획사가 관심을 보였다. 이중 윤병주가 소개한 석기시대가 이들의 선택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96년 11월 드디어 첫 데뷔 앨범 [비둘기는 하늘의 쥐]가 세상에 나왔다. 1집은 인디 레이블의 앨범임에도 타워레코드와 신나라레코드 등 대형 음반점의 차트에서 상위권에 오르며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언론과 평단의 반응도 좋았다.

 

처절한 실패, 그리고 상업적인 성공

 

그러나 1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언니네 이발관은 잠시 공백을 가져야 했다. 정대욱은 고3이 되어 학업에 전념하게 됐고, 유철상은 흑인음악을 하겠다며 탈퇴했다. 애초에 전업 음악인의 길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류기덕은 직장인이 됐다. 혼자 남은 이석원도 음악과 관계가 없는 일을 하며 일 년을 보냈다. 직접 기자 겸 발행인을 맡아서 대중문화 전문지 월간 ‘박스’를 만들기도 했다.

 

1998년 대학생이 된 정대욱이 돌아왔고, 윤병주와 함께 1집의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던 노이즈가든의 베이시스트 이상문이 합류했다. 마찬가지로 노이즈가든의 드러머 김태윤도 들어왔다. 다시 4인조 라인업을 꾸린 언니네 이발관은 오랜 작업 끝에 2집 [후일담]을 발표했다. 작곡은 이석원과 정대욱이 공동으로 맡았으며, 편곡은 정대욱이 담당했다.

 

1집과 달리 2집은 한결 안정적인 연주력이 뒷받침이 되었고, 하나의 앨범으로 맥락이 완성되도록 애쓴 흔적이 돋보였다. ‘어제 만난 슈팅스타’, ‘꿈의 팝송’, ‘순수함이라곤 없는 정’ 등 매력적인 곡도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야심작 2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외면당한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2집 실패의 여파는 적지 않았다. 초보들이 좌충우돌한 1집은 사랑받은 반면, 나름 단단히 준비한 2집은 실패했다는 괴리 때문이다. 이석원은 “음악적으로 진보적인 곡들을 뽑아내려고 애썼고, 오래 들어도 싫증 나지 않는 앨범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결과가 안 좋았기 때문에 ‘이런 걸 해도 소용없구나. 아무도 안 알아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멤버들은 더 이상의 활동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잠정적으로 폐업 선언을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밴드의 중심인 이석원은 직장인이 되어 웹 콘텐츠 회사, 공연기획사 등에서 일했다. 이석원은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니까 3~4곳의 회사를 다녔는데, 일 분에 한 번씩 시계를 보곤 했다.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언니네 이발관이 다시 가동된 것은 2001년이다. 이석원은 “그때 강아지가 아팠다. 가난한 직장인이던 내가 수술비를 마련할 길은 음반 계약을 해서 계약금을 받는 것 외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때마침 1집과 2집이 뒤늦게 호응을 얻으면서 3집에 대한 제안도 들어왔다. 이석원은 임시 멤버를 구해서 공연 활동을 했고, 이 과정에서 베이시스트 정무진이 정식 멤버가 되었다.

 

2002년이 되자 이석원은 ‘완벽한 멤버가 아니면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새 멤버를 찾기 위해 오디션을 진행했다. 먼저 드러머 전대정이 합류했다. 블랙메탈 밴드 칼파 출신의 그는 팝을 하고 싶다는 갈망에 언니네 이발관의 문을 두드렸다. 전대정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밴드를 했는데, 당시에는 ‘메탈 해야 음악을 하는 거지’라는 말도 안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칼파도 굉장히 빠르고 무섭고 정신없는 음악이었다. 듣다 보면 괜찮긴 한데, 도저히 더 못 하겠어서 접었다”고 말했다.

 

기타리스트 이능룡은 20~30명이나 오디션을 거친 뒤 막판에 나타났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기타를 잡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밴드 활동은 처음이었다. 이석원의 말에 따르면 연주를 나름 한다는 사람들이 와서 언니네 이발관의 곡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는데, 이능룡은 제대로 했다고 한다. 이석원은 “능룡이가 와서 너무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능룡이는 그만큼 뛰어난 뮤지션”이라고 말했다.

 

이석원은 “나는 운명론자라서 내가 언니네 이발관을 다시 할 운명이라면 멤버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이능룡과 전대정은 누구보다도 언니네 이발관에 잘 맞는 조각이었다. 유독 멤버의 부침이 심했던 언니네 이발관이 ‘밴드’로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 것이다. 그 뒤 전대정과 이능룡은 2017년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까지 이석원과 함께 했다.

 

2002년 4년 만에 나온 3집 [꿈의 팝송]은 2집의 실패를 무색케 하는 성공을 거뒀다. 연말에는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첫 단독 공연도 했다. 이후 모든 곡이 이능룡의 손을 거쳐 밴드에 맞게 재편곡되면서 언니네 이발관은 라이브 활동이 좀 더 잦아졌다. ‘월요병 콘서트’, ‘봄의 팝송’ 등 매번 독특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언니네 이발관 특유의 서사가 있는 공연 스타일이 이때 확립됐다.

 

2004년 4집 [순간을 믿어요]는 3집 이상으로 철저하게 대중성을 지향한 앨범이었다. 그러나 꽉 짜이고 무거워진 로큰롤이 예전의 아마추어적인 서정성을 기대한 기존 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작사를 맡은 이석원은 영어를 배제한다는 원칙을 깨고 ‘순간을 믿어요’에 영어 가사를 집어넣기도 했다. 한편 언니네 이발관 초기 멤버이자 이석원의 절친한 친구인 이상문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겹치면서, 4집은 그를 추모하는 헌정반이 되었다.

 

상반되는 평가와는 별개로 4집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또 언니네 이발관의 커리어에서 빠질 수 없는 ‘월요병 콘서트’가 브랜드 콘서트로 유명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즈음 정무진이 자신의 밴드 활동을 위해 탈퇴했고, 세션 베이시스트 유정균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여기에 5집 이후 임주연(건반)이 세션으로 가세한 멤버는 그 뒤 오랫동안 언니네 이발관의 고정 멤버가 됐다.

 

가장 보통의, 그러나 특별한 존재

 

그러나 4집의 성공 이후 언니네 이발관은 다시 한번 분열을 겪게 된다. 2006년 이석원은 인사동에 ‘살롱 드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전대정도 자신의 생활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기타리스트 이능룡이 탈퇴했다. 음악이 아닌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쓰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석원에게 ‘가장 보통의 존재’의 모티브가 되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이석원은 “이 사건 때문에 어떻게든 죽을힘을 다해 나를 증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오로지 이석원 본인만 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셋은 다시 뭉쳤고,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5집의 작업 방식과 강도는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석원은 음반사 측에 “내가 몇 번을 다시 작업하든 절대로 중단시키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평소에도 예민한 완벽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그가 얼마나 강박적으로 작업에 매달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만들었다가 수정하고, 그러다 엎고, 다시 만들고의 반복이었다.

 

예를 들어 녹음과 믹싱까지 다 마쳤는데 가사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고, 하나를 바꾸면 전체적인 뉘앙스 때문에 가사 전체가 미묘하게 바뀌고, 그러면 톤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시 녹음을 해야 하는 대공사가 되는 식이었다. 믹싱은 곡마다 15번, 마스터링은 8일간 했다. 엔지니어들이 정말 진지하게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석원은 그렇게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목표가 ‘사운드’라는 구체적인 것이 아닌, ‘감정’이라는 추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밀한 부분까지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곡 작업에만 삼 년, 녹음에 또 일 년이 걸리고 앨범 발매일이 다섯 번이 변경된 끝에 2008년 나왔다. 심지어 그 중간에는 앨범 발매 공연 날짜를 잡아놓고 공연장 대관까지 했다가 변경되는 바람에, 앨범도 없이 앨범 발매 공연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석원은 앨범을 다시 듣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 나오는 순간 어디로 도망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보통의 존재가 뭔가요’라는 질문이 너무 힘들었다. 그게 무엇인지를 몇 년에 걸쳐 앨범에 담았는데, 거기서 겨우 빠져나오려는 순간인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해서 나온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굴곡 많은 밴드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 중 하나가 되었다. 선주문으로만 5,000장이 판매되는 등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는 올해의 앨범, 최우수 모던 록 음반, 최우수 모던 록 노래까지 휩쓸며 3관왕이 되었다.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

 

언니네 이발관은 6집은 5집처럼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2017년 6집 [홀로 있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석원은 이전부터 5집이나 6집 즈음이 밴드 활동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암시한 바 있다. 그는 “작품이 꼭 작가에게 즐거움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해왔다. 5집이 나왔을 때도 “마흔 살 넘어서 밴드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면 초조하다. 내 안의 세포가 계속 죽어가고 있는 걸 느낀다. 가진 거 쥐뿔도 없고 음악 하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더 이상 못하게 되는 순간이 공포로 다가온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5집만큼 완성도가 높지만, 어딘가 쓸쓸한 황혼의 분위기를 띤 6집은 예고대로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이석원은 앨범을 낸 지 두 달 만에 “좋아하는 음악이 일이 된 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밴드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은 것으로 보이며, 멤버들도 각자의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석원의 말에 따르면 음악을 다시 할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둔 것은 아니지만, 언니네 이발관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이능룡은 2018년부터 이이언과 프로젝트 듀오 ‘나이트오프’를 결성, 인상적인 싱글을 꾸준하게 내놓고 있다. 또 이상은, 요조 등의 앨범에 작곡 및 프로듀서, 연주자로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이석원은 5집 활동 때 인터뷰를 한 월간 <PAPER>의 황경신 편집장이 “꼭 글을 써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유한 것을 계기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 첫 에세이집 <보통의 존재>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으며, 그 뒤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순간을 믿어요> 등 여러 권의 소설과 에세이집을 발표했다.

 

 

[사진출처=블루보이]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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