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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4
by 최승우

1990s 크래쉬 (CR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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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24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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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데뷔 이후 크래쉬(Crash)는 30년 동안 줄곧 한국 헤비메탈의 정점(頂點)에 있었다. 과격함의 극치를 달리는 연주와 절규에 가까운 보컬, 계속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실험을 모색하는 유연성, 오랜 세월 치열하게 밴드를 이끌어온 뚝심 등은 이들을 최고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더 센 음악’을 찾아 듣다가 시작한 밴드

 

헤비메탈이라는 음악에는 의외로 많은 하위 장르와 다양한 변주가 존재한다. 그래도 공격적인 드럼과 금속성의 기타, 샤우팅 창법, 장발 로커들의 헤드뱅잉 등 세간에 알려진 일반적인 이미지에 무엇보다 부합하는 장르는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일 것이다. 크래쉬는 록 밴드 하기 어렵다는 한국에서, 그 가운데서도 가장 격하게 입지를 위협받고 있는 스래시 메탈 밴드로서 30년 동안 거목처럼 자리를 지켜온 밴드다.

 

크래쉬의 리더 안흥찬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많은 음악을 들었지만, 훗날 음악을 하면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친구에게 “센 음악 좀 추천해달라”고 했고, 그때 접한 헤비메탈 때문에 성격도 바뀌고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처음에 들은 것은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였고, 그 뒤 메가데스(Megadeth), 베놈(Venom), 슬레이어(Slayer)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 즈음 유행하던 LA메탈 스타일이 싫었다. 공주 머리, 화장, 딱 붙는 스판덱스 바지 같은 것들. 그래서 더 센 음악을 찾아 들었다”고 돌아봤다.

 

안흥찬이 본격적으로 악기를 잡게 된 것은 고3 때다. 베이스를 치는 후배가 부모님에게 들킬까 봐 그의 집에 악기를 맡기곤 했는데, 그걸 이리저리 튕겨보다가 재미를 붙였다. 그 뒤 음악 지식을 좀 더 체계적으로 쌓고 싶은 생각에, 절친 이영호와 함께 남영동에 있는 음악 학원 겸 라이브 클럽 ‘송설’에 들어갔다. 그리고 송설에서 안흥찬과 이영호는 윤두병과 정용욱을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윤두병은 학교를 자퇴한 상황이었고 정용욱은 그보다도 어린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안흥찬은 정용욱에 대해 “음악적으로 센스가 있고 노력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안흥찬과 이영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91년 안흥찬(보컬, 베이스), 이영호(기타), 윤두병(기타), 정용욱(드럼)의 4인조 밴드 크래쉬가 결성됐다.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의 탄생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공연 활동을 통해 언더그라운드 메탈 신에서 인지도를 쌓아가던 크래쉬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93년이다. 1980년대 말부터 음반 산업에 진출한 SKC가 산하의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 ‘메탈 포스’(Metal Force)를 설립, 이들에게 계약을 제의한 것이다. 앨범 발매에 앞서 크래쉬는 이태원 비바 아트홀에서 열린 메탈 포스 기념 공연에 참여했는데, 400명 정원의 공연장에 500명을 웃도는 관객이 들어찼다. 그 정도로 이들은 이미 기대를 모으는 밴드가 되어 있었다.

같은 해 크래쉬는 환경보전 캠페인 공연으로 기획된 <’93 내일은 늦으리>에 참여, 오프닝을 맡게 되었다. 당시 관객은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 등의 스타를 보러 모인 십 대 팬이 대다수였는데, 이들은 시커먼 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장발을 상모 돌리듯 휘두르며, 마치 악마의 거두 같은 괴성을 내지르는 크래쉬를 보고 기함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이 공연 실황은 공중파로 방송됐는데 크래쉬의 무대는 심의 문제로 편집됐다. 그럼에도 이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분명했다.

 

그 뒤 크래쉬는 옴니버스 앨범 [‘93 내일은 늦으리]에 7분여의 대곡 ‘최후의 날에’를 수록했다. 아직 1집을 녹음하기 전이었기에 그들에게는 첫 녹음이자 메이저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이었다. 윤두병은 “그때 녹음실 관계자들에게 우리는 시끄러운 음악 하는 철없는 애들로 보였을 것”이라며 “그래서인지 우리도 약간 주눅이 들어 녹음했다”고 회고했다.

워밍업을 마친 크래쉬는 본격적으로 1집 작업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메탈 포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영국 출신의 프로듀서 콜린 리처드슨(Colin Richardson)과 작업하게 된 것은 결정적인 행운이었다. 리처드슨은 네이팜 데스(Napalm Death), 피어 팩토리(Fear Factory) 등을 프로듀싱한 업계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한 명이었다. 크래쉬의 멤버들은 지금도 리처드슨에 대해 “콜린과 일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입을 모은다.

 

1994년 드디어 크래쉬의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Endless Supply Of Pain]이 나왔다. 그동안 한국의 메탈 밴드들은 좋은 곡과 연주력을 보유하고도 녹음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히곤 했는데, 크래쉬의 앨범이 그 기준을 단숨에 끌어올린 것이다. 리처드슨은 당시 국내 프로듀서들의 관행에서는 볼 수 없었던 노하우와 기술을 통해, 스래시 메탈 음반에 무엇이 담겨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정용욱의 폭발적인 드럼, 윤두병의 날이 잔뜩 선 기타, 안흥찬의 묵직하면서도 선명한 베이스, 그리고 야수 같은 보컬이 생생하게 담긴 1집을 들어보면, ‘과격한 소음’이라는 편견의 대상이 되곤 하는 스래시 메탈이 실제로는 얼마나 세심함이 요구되는 음악인지를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1집이 나온 지 두 달여 만에 크래쉬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생겼다. 안흥찬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수록곡 ‘교실 이데아’에 피처링으로 참여하면서다. 당시 서태지는 크래쉬의 음악을 듣고 “국내에는 왜 이런 목소리가 없냐”고 아쉬워하다가, 국내 밴드라는 걸 뒤늦게 알고 바로 안흥찬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 곡은 역방향으로 재생하면 사탄의 메시지가 들린다는 백마스킹(backmasking) 해프닝까지 겹치면서 더 유명해졌다. 안흥찬은 “이후로는 서태지 씨와 딱히 연락한 적이 없다. 적당한 시기에 서로의 장점을 한껏 이용한 ‘윈-윈’이었던 셈”이라고 밝힌 바 있다.

 

[Endless Supply Of Pain]은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비메탈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적극적 소비층이 많지 않은 시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한 성공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크래쉬는 크고 작은 공연을 이어가며 고정 팬을 확보해갔다. 특히 크래쉬는 에너지 넘치는 연주 외에도, 관객의 흥을 끌어올리고 공연 흐름을 재미있게 이끄는 방법을 아는 밴드였다.

 

“틀에 박힌 것을 거부하고 깨는 것이 본질이다.”

 

크래쉬의 2집 [To Be Or Not To Be]는 이듬해인 1995년 나왔다. 멤버들은 이번에도 리처드슨과 작업하기를 원했지만, 여러 사정상 저드 패커(Judd Packer)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패커 역시 업계의 유명 프로듀서였지만, 안흥찬은 “콜린과 달리 저드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만 명확하게 해주는 ‘로보트’ 같았다”고 말했다. 패커는 엔지니어 역할을 하고 사실상 멤버들이 셀프 프로듀싱을 한 앨범인 셈이다. 안흥찬은 “1집은 선장(리처드슨)에 사공이 셋이었다면, 2집은 선장이 셋이었다. 어쨌든 굉장히 열심히 만든 앨범”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1집보다 좀 더 매끄러워진 반면 실험적인 요소가 가미된 2집은 팬들 사이에서 평이 엇갈렸다. 여기에는 앞서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이 자신들이 하려던 것과 방향성이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에, “뒷배를 타는 것은 싫다”는 생각에 노선을 수정한 이유도 있었다.

이후 서울음반으로 소속사를 옮긴 크래쉬는 1997년 3집 [Experimental State Of Fear]를 발표했다. 윤두병이 탈퇴하고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이성수, 하재용이 합류해 만든 앨범이다. 멤버들은 최상의 녹음을 위해 앨범 계약금 대신 해외 레코딩을 조건으로 걸었고, 그 결과 녹음부터 믹싱, 마스터링까지 전 과정이 영국에서 진행됐다. 리처드슨과도 다시 호흡을 맞췄다. 안흥찬은 “사실 스튜디오는 국내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엔지니어들의 예민한 귀와 감각, 삶의 영역 전체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굉장히 크다”고 말했다.

3집은 공을 들인 만큼 크래쉬가 사운드 면에서 가장 돋보인 앨범이라고 자평하는 작품이다. 1,2집이 기타에 중심이 맞춰져 있다면 3집은 리듬에 중점을 두는 등, 여러 가지로 스래쉬 메탈 밴드가 생산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상업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는데 매니지먼트 문제가 컸다. 또 크래쉬는 데뷔 때부터 줄곧 해외 진출을 희망했지만, 소속사에서는 이를 고려하지 않는 등 홍보 활동이 상당히 삐걱거렸다고 한다.

예전 안흥찬은 “스래쉬 메탈 하면 흔히 남성적인 관능과 폭발적인 사운드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그보다는 틀에 박힌 것을 거부하고 깨려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3년이 지나 발표한 4집 [Terminal Dream Flow]는 그런 지론에 부합하는 앨범이었다. 크래쉬는 강렬한 스래시 메탈과 댄서블한 전자음을 절묘하게 비틀어 엮는 파격적인 시도로 기존 팬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이 시기의 라인업은 기존의 안흥찬과 정용욱, 하재용에 오영상(기타), 김유성(키보드)였는데, 특히 전자음악에 조예가 깊은 넥스트(N.EX.T) 출신 키보디스트 김유성의 가세는 변화의 핵심이었다.

 

3집 즈음부터 컴퓨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안흥찬은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 등이 이끄는 당시의 전 세계적 트렌드를 반영했다.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의 라인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작업에 한계를 느낄 때였다. 기존의 시스템으로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4집의 변화를 설명했다. 워낙 드라마틱하게 바뀐 탓에 커리어에서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4집은 크래쉬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이후 크래쉬는 안흥찬, 정용욱, 하재용, 임상묵(기타)으로 라인업을 재정비, 2001년 5집 [The Massive Crush]를 공개했다. 안흥찬은 5집을 “3집에서 4집으로 넘어가는 음악적 괴리에 대한 중간적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3집과 4집의 극단적인 변화 사이에서 절충을 꾀한 앨범이라는 의미다. 

다만 5집은 봄여름가을겨울의 ‘어떤이의 꿈’, 신해철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등 수록곡의 절반 가까이가 리메이크 혹은 재수록곡으로 채워졌다. 이 때문에 각각의 곡이 지닌 매력과는 별개로 전체적인 응집력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게다가 리메이크곡이 CF에 사용되는 등 유명해지면서 정작 참신한 시도를 한 신곡이 관심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안흥찬은 “100%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만들었다. 여섯 곡 정도밖에 작업이 안 끝났는데, 회사에서 자금 상황 때문에 빨리 해야 한다고 재촉해서 급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5집은 크래쉬의 가장 큰 정체기였다”라고 밝혔다.

 

이후 크래쉬는 7년의 긴 공백을 가졌다. 전 소속사와 계약 문제 등이 원활하지 못해서 활동이 제한된 것도 이유였다. 그리고 2010년 안흥찬, 윤두병, 하재용, 정용욱의 라인업으로 여섯 번째 정규 앨범 [The Paragon Of Animals]를 발표했다. 원년 멤버들이 돌아온 만큼 전작들의 전자음을 배제하고 기본적인 밴드의 연주에 충실하는 등, 처음의 원초적인 에너지로 회귀하고자 애쓴 결과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전처럼 저돌적인 직진이 아닌, 노련하게 맥락을 짚는 완급 조절과 여유가 엿보이는 비범한 앨범이라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여전히 앞으로가 기대되는 스래시 메탈의 거목

 

안흥찬은 “우리는 아이돌처럼 유행에 민감한 음악은 아니라 앨범과 앨범 사이에 2년 정도의 휴식은 적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크래쉬가 앨범을 내는 간격은 4년, 7년 등으로 계속 길어지고 있다.

 

크래쉬는 6집 이후 4년의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탈퇴와 복귀를 반복하던 윤두병이 완전히 밴드를 떠났다. 이후 임상묵이 돌아와 그 자리를 채우면서 2014년 [Untamed Hands In Imperfect World]를 발표했다. 5곡이 수록된 밴드 최초의 EP로, 6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편 아날로그의 향취가 강하게 느껴지는 앨범이다.

 

멤버들은 EP를 “다음 앨범을 위한 가이드, 심호흡, 힘이 배인 매듭”이라고 설명하면서 7집이 머지않아 나올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 뒤 9년째 새 앨범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이는 매일 트렌드가 손바닥처럼 뒤집히고 하루하루 너무 빠르게 격변하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특히 크래쉬 같은 록 밴드에게는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바뀌는 현실에서, 결코 좋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크래쉬는 “’우리를 누가 알아주나’ 하는 고민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타협한다고 해서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알아준다고 생각하고 계속 갈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마니아층이 극소수인 헤비메탈을 계속 해온 것에 대한 책임감도 내비쳤다. 또 “밴드의 기본은 공연이며, 크든 작든 계속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들은 대형 페스티벌,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의 기획 공연 등 꾸준히 라이브를 선보이고 있다.

 

안흥찬은 “최소한 앞으로 두 장의 정규 앨범을 힘껏 만들자고 멤버들과 이야기했다”며 “마스터피스를 만들고 팬들에게 떳떳하고 정갈한 마무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험난한 길을 걸어오면서도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지켜온 그들의 행보를 보면, 여전히 앞으로가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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