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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1
by 최승우

1980s 박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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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31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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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연의 이름 앞에는 ‘한국의 1세대 재즈 보컬리스트’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김상희나 윤복희처럼 재즈를 넘나든 대중가수는 있었지만, 박성연처럼 재즈 보컬리스트라는 정체성을 한 번도 놓지 않은 이는 유일무이하다. 또한 그녀가 평생을 이끌어온 재즈클럽 ‘야누스(Janus)’는 그 존재 자체로 한국 재즈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나는 선천적으로 음악을 좋아했다”

 

박성연은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다만 유족들의 전언에 따르면 주민등록상으로는 1943년이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1942년이라고 한다.

 

박성연이 어렸을 때 집안 사정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시절 여성으로는 드물게 인문계 고등학교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박성연은 운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이화여중고 시절에는 농구와 배구선수로 뛰기도 했다.

 

박성연은 “나는 선천적으로 음악을 좋아했다”고 말하곤 했다. 가족들이 전부 음악을 좋아해서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창을 잘했고, 트럼펫도 불었다. 음반도 많이 수집했고, 유성기나 전축을 몇 대씩 갖고 있었지만 6.25를 거치면서 다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 날 미8군 PX에서 일하던 오빠가 박성연에게 라디오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주한미군 방송인 AFKN에서 나오는 팝 음악에 빠졌다. 그 덕분에 박성연은 베니 굿맨(Benny Goodman), 글렌 밀러(Glenn_Miller), 마리오 란자(Mario Lanza) 등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때만 해도 재즈가 뭔지 알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박성연이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한 것은 미8군 무대를 통해서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서울대 불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도 어려워진 데다 성적도 부족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 뒤 일 년 정도는 허송세월을 하며 보냈는데, 늘 같이 다니던 친구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어울려 놀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미8군 무대라는 곳이 있는데, 넌 노래하는 걸 좋아하니 도전해 보라”고 권유했고, 그저 ‘심심해서’ 지원했던 오디션에 덜컥 붙어버린 것이었다. 박성연은 오디션에서 유명 재즈 스탠더드인 ‘Stardust’, ‘Cheek to Cheek’, ‘Just In Time’ 등을 불렀는데, “생각해 보면 재즈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곡을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8군에서는 재즈가 성행했는데, 박성연은 재즈라는 음악의 에너지에 홀리듯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일일이 음반을 듣고 채보해서 악보를 만들며 독학으로 재즈를 파고들었다. 음악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숙명여대 작곡과에도 들어갔다.

 

이후 1970년대 초반 소공동의 뮤직 레스토랑 포 시즌스, 조선호텔, 스프링 버라이어티쇼, 내자호텔 등에서 정성조 등과 합을 맞추며 공연 활동을 했다. 당시의 척박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순회공연을 두 차례나 다녀왔고, 해외 페스티벌 무대에도 섰다. 1974년에는 국내 최초의 재즈 연주회인 <박성연 노래와 영상의 밤>이란 행사를 열었다. 공연 활동과 병행하느라 학교는 7년을 다니고 나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전설이 된 야누스의 시작

 

한국에서 재즈 뮤지션이거나, 혹은 재즈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중 어떤 식으로든 야누스와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야누스는 수많은 재즈 뮤지션을 배출한 산실이자 사랑방이었으며, 재즈가 독자적인 양식을 지닌 음악 장르라는 인식을 만든 역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박성연이 자신의 재즈 클럽 야누스를 열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재즈를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부르고 싶어서”다. 이전까지 그녀는 여러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했지만, 클럽 주인들은 손님들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즈가 아닌 팝이나 유행가를 요구했다. 만취한 손님에게 수모를 겪거나 클럽에서 해고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결국 박성연은 재즈인들끼리 실컷 놀아보자는 생각에, 친구에게 돈을 빌리고 돈 될 만한 물건을 전부 팔아서 신촌역 앞의 허름한 여관골목 2층에 클럽을 열었다. 클럽 이름으로는 서른 개 이상의 후보가 있었는데, 결국 영문학자 문일영이 추천해준 야누스가 낙점됐다. 박성연은 “야누스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양면성의 신이다. 한국 재즈 클럽의 시작이기도 하고, 보호해달라는 마음도 담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클럽을 연다고 하자 어머니는 “술집을 차리려는 거냐. 술집을 하면 지옥에 가서 화롯불을 머리에 이고 있게 될 것”이라고 크게 반대하셨다고 한다.

 

야누스는 재즈의 불모지 한국에서 소중한 싹이었다. 밤낮으로 재즈를 부르고 연주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공간이 드디어 생긴 것이다. 재즈가 좋아서 어깨 너머로 독학한 1세대 연주자들은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고, 늦은 밤에는 야누스에 모였다. 신관웅, 이판근, 조상국, 김수열, 강대관, 최선배, 유영수 등이 그들이었다. 박성연의 말에 따르면 “그만큼 재즈에 굶주려 있던 시절”이었다.

 

1983년 2월 북한의 공군 장교 이웅평이 전투기를 몰고 귀순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전국의 학교에 비상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생들은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친구들과 비장한 작별 인사를 나눌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박성연과 동료들은 그때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야누스에서 신나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재즈를 모르면서도 야누스 앞을 지나다가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이끌려 들어오는 젊은 예술가들도 많았다. 박성연은 “그때 야누스 출입문이 꽤 무거웠는데 다들 그걸 가볍게 열고 들어오더라”며 “재즈를 알아서라기보다는 그 자유와 해방감 같은 게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야누스 재즈 동호회’를 만들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공연 대신 매달 한 번씩 정기 음악회를 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고유 브랜드가 되는 기획공연을 만든 것이다.

 

물론 재즈의 인프라가 아예 없는 나라에서 재즈 클럽을 경영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을 넘어서 험난했다. 박성연은 공연 때 자신의 돈을 들여 팸플릿을 만들고 우편 발송까지 도맡았다. 사람을 모으려고 하루에 전화를 60통씩 하기도 했다. 게다가 야누스에는 관객이 많은 날보다는 적은 날이 더 많았고, 심지어 아예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주위 사람들은 “사람이 많든 적든, 야누스에서 노래하는 박성연은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고 돌아봤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클럽을 지키다

 

야누스는 1985년 신촌을 떠나 혜화동으로 첫 번째 이사를 했다. 이 시기는 야누스가 가장 활기를 띠기도 했고, 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던 때다. 여전히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공연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고 열기가 넘쳤다. 정기 공연 때는 밖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노래하곤 했다.

 

야누스는 재즈 뮤지션들에게 편견 없이 열린 곳이었지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준은 엄격했다. 1999년부터 야누스에서 노래한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는 “야누스 무대에는 아무나 설 수 없었다. 선생님은 연주자들을 엄격하게 선별하셨다. 실력 있는 뮤지션이 나타나면 주저 없이 무대에 올리고, 후배들과 함께 노래하기를 즐기셨다. 모자란 점은 가차 없이 지적하고, 칭찬엔 늘 인색함이 없으셨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재즈 클럽 야누스의 운명은 여전히 박복했다. 혜화동에서 어렵게 터전을 일궜지만 건물주의 말 한마디로 쫓겨나듯 다시 떠나게 된 것이다. 박성연은 “혜화동 시절을 접으면서 빚을 갚느라 어머니 집까지 팔아야 했다”고 말했다. 믿고 일을 맡겼던 주방장이 하루 매상을 정기적으로 착복한 일도 있었다. 박성연은 1996년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이대 후문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동업자들이 “재즈만 해서는 유지가 안 된다”며 발을 빼는 바람에 일 년 만에 다시 청담동으로 옮겨야 했다.

 

청담동 야누스는 예스러웠던 신촌과 혜화동 시절과 달리 깔끔하고 세련되게 변모했고, 규모도 좀 더 커졌다. 또 신촌 시절부터 야누스를 찾았던 어느 사업가가 고가의 하이엔드 오디오를 무료로 임대해주고, 악기를 새 것으로 바꿔주는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전인권과 봄여름가울겨울 등이 후원 공연을 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쌓여가는 적자에 2007년 서초동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박성연은 “나는 경영에는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면서도 야누스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런 악전고투 속에서도 재즈에 대한 박성연의 집요한 애정은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년 한 번 정도는 싸구려 비행기표를 사서 뉴욕으로 날아갔고, 블루 노트와 빌리지 뱅가드 등 유서 깊은 재즈 클럽을 돌았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Grover Washington Jr.)의 공연을 보기 위해 클럽 앞에 7시간을 앉아 기다리기도 했다. 할렘가를 찾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또 잔뜩 싸들고 간 공테이프에는 미국 라디오의 재즈 전문 프로그램을 녹음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이는 재즈 본고장의 트렌드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야누스는 2012년 다시 한번 위기를 맞았다. 계속 불어나는 적자에 박성연은 평생 모아온 음반 1,700장을 경매로 내놓아서 운영비를 충당했다. 이때 음반을 처분한 가격은 단돈 1,000만 원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때는 정말 섭섭해서 소주 한잔 마시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절실했다”고 말했다. 클럽을 간신히 지켜냈지만, 이 즈음 전부터 좋지 않았던 박성연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2015년 박성연은 신부전증이 악화돼 응급실로 실려갔고, 요양원 생활을 시작했다. 주인을 잃은 야누스는 기약 없이 문을 닫아야 했다.

 

그때 1999년부터 야누스에서 노래해온, 박성연이 가장 아끼는 후배 중 한 명인 말로가 나섰다. 말로는 재즈 클럽 에반스의 홍세존 대표와 공동으로 야누스의 운영권을 넘겨받았고, 평생 노래를 한 박성연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디바 야누스’로 이름도 바꿨다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오르다

 

박성연이 첫 번째 앨범 [박성연과 Jazz At The Janus]를 발표한 것은 1985년이다. 이판근, 신관웅, 정성조 등 야누스 동우회 멤버와 함께 한 앨범으로, 박성연은 직접 작곡한 ‘물안개’를 비롯해 마이클 프랭스(Michael Franks)의 ‘Antonio’s Song’,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노래로 유명한 ‘I'M Fool To Want You’ 등을 특유의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허스키 보이스로 호소력 있게 소화해냈다. 듀크 엘링턴의 ‘If Don’t Mean A Thing’에서는 화려한 스캣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판근이 재즈로 편곡한 ‘밀양 아리랑’으로 서구의 음악을 한국에 어떻게 이식시킬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드러냈다.

 

그러나 박성연은 앨범이 유독 적은 뮤지션이다. 즉흥성이 특징이고 녹음 속도가 일반적으로 빠른 재즈 뮤지션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1998년 2집 [The Other Side Of Park Sung Yeon], 2013년 3집 [Park Sung Yeon with Strings]까지 정규 앨범이 단 세 장이니, 활동해온 세월에 비하면 엄청난 과작(寡作)이다. 다른 뮤지션과 협업한 경우도 많지 않다. 이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 그리고 “재즈는 결국 클럽 음악이고, 공연을 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잘 맞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지론에 맞게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박성연은 노래를 놓지 않았다. 2016년에는 피아니스트 임인건이 발표한 앨범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Janus, The Reminiscence)]에 참여했다. 임인건은 25년 넘게 몸을 담은 자신의 음악적 고향인 야누스를 기억하기 위해 곡을 썼고, 박성연을 포함한 1세대 선배들을 모아 앨범을 만들었다.

 

박성연은 이 앨범에서 ‘별빛의 노래’, ‘바람이 부네요’, ‘길 없는 길’ 세 곡을 불렀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병원을 나와서 연습과 녹음을 하고, 다시 돌아가서 입원하는 열의를 보였다. 임인건은 “박성연 선생님은 가수는 절대 가사를 보면서 노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늘 부르던 스탠더드가 아닌 창작곡인 이 곡도 가사를 전부 외워서 부르셨다”고 말했다.

 

2017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서 박성연은 휠체어를 타고 등장, 말로와 함께 특별 공연으로 감동적인 무대를 선사했다. 그리고 2018년 11월에는 오랜만에 야누스를 찾았고, 마련한 야누스 40주년 기념 무대에 이번에도 휠체어를 타고 올랐다. 비록 목소리는 거칠고 숨은 가빴지만, 관객들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펼쳐내는 듯한 그녀의 노래에 눈물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2019년에는 사실상 노래를 하기 힘든 몸 상태에도 불구, 서울숲재즈페스티벌 특별 무대를 소화해 내는 기염을 토했다.

 

“고통은 나의 블루스를 더 깊게 만든다”

 

2019년 박효신과 ‘바람이 부네요’를 듀엣으로 협업하는 등 끝까지 노래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박성연은, 다음 해인 2020년 8월 23일 은평구의 요양원에서 향년 77세로 눈을 감았다. “무대에서 죽는다는 말은 내게 덕담이다. 죽을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삶으로 증명해낸 것이다.

 

박성연은 “내가 음악에 인생을 바친 게 아니라 음악이 나에게 인생을 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인생의 이 모든 고통에 대해 불만이 없다. 이 모든 게 내 블루스를 더 깊게 만들어준다”는 말도 남겼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고통스럽긴 했지만, 후회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도 “어떤 남자가 재즈처럼 몇 십 년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곤 했다.

 

온갖 어려움에도 야누스를 지켜온 것 역시 헌신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내 생명력이자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끝끝내 지켜낸 디바 야누스는 2023년부터 신사동에 새로운 터를 잡고 역사를 이어가는 중이다. 박성연은 헌신이라는 말을 부인했지만, 21세기 들어서 양과 질 모두 빛나는 성장을 이룬 한국의 재즈계가 그녀에게 진 빛을 말로 다 형용하기는 힘들 듯하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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