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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8
by 최승우

1990s 루시드 폴 (Lucid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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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18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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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Lucid Fall)은 뮤지션이면서도 한때는 과학자였고, 지금은 농부이며 작가이기도 하다. 이런 다층적인 정체성처럼 그의 음악도 ‘서정’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없다. 밴드 '미선이’ 시절부터 루시드 폴은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시선, 인간에 대한 연민 등을 드러냈고, 뮤지션의 사명에 대해 고민해왔다.


‘미선이’의 짧고도 확실한 흔적

 

국내에서 음악 신이라면 으레 홍대가 떠오를 만큼 지방의 문화적 인프라는 서울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로컬 신에서 끈끈하게 활동 중인 뮤지션은 있었다. 그중 부산은 레이니 썬(Rainy Sun), 에브리 싱글 데이(Every Single Day), 앤(Ann), 피아(Pia) 등 이른바 ‘1세대 밴드’들을 시작으로, 좋은 뮤지션을 꾸준히 배출해왔다.

 

다만 루시드 폴(본명 조윤석)은 고향 부산에서는 음악 활동을 한 적이 없었고, 지역 뮤지션들과의 교류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막연하게 음악을 하고 싶은 생각은 계속 있었다. 집안 문제 등 굴곡 많은 삶 때문이기도 했고, 음악을 좋아하던 중학교 때의 친구 영향도 있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비트가 있는 음악은 안 들을 만큼” 록 음악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때만 해도 밴드를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좋아한 음악은 뉴에이지나 보사노바, 들국화나 김민기 등이었다.

 

루시드 폴이 처음으로 음악계에 이름을 내민 것은 대학(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다. 1993년 제5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 나가서 ‘거울의 노래’로 동상을 수상했다. 말로, 이규호, 이한철, 윤영배 등이 이 해에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함께 입상한 동문이다. 그 뒤 1995년에는 대학가요제에도 도전했지만 예선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그 뒤로도 한동안 방안에서 혼자 기타만 치는 나날이 계속됐다. 욕구불만이 쌓여 ‘사이코’가 될 것 같아서,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밴드를 만들기로 했다. 밴드를 만들면 어떻게든 자신의 음악이 형상화가 되고, 라이브클럽에서 공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1997년 후배들을 모아서 결성한 것이 3인조 밴드 미선이다. 일렉트릭 기타도 그때 처음 잡았다.

 

미선이는 1998년 4월 옴니버스 앨범 [해적방송]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데뷔 앨범 [Drifting]은 그 이듬해인 1999년 나왔다. 녹음 직전, 이준관(베이스)이 탈퇴하면서 1집은 사실상 루시드 폴과 김정현(드럼)의 2인 체제로 작업했다. 대부분의 곡은 루시드 폴이 만들었고, 김정현이 공동으로 편곡을 담당하며 틀을 잡았다.

 

미선이의 앨범은 당장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게 관심을 끌었다. 이들의 음악이 가진 아우라는 동시대의 비슷한 팝 계열 밴드인 언니네 이발관이나 델리 스파이스와도 달랐다. 서정적이면서도 신파적이지 않고, 몽환적인 한편, 어딘가 날이 선 분노가 있었다. 이 앨범은 여러 음악 매체에서 ‘올해의 베스트 앨범’ 상위권을 차지했으며, 한국일보는 ‘가장 중독성이 강한 앨범’으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Drifting]은 미선이의 유일한 정규 앨범이 되었다. 처음에는 두 명이서 객원 멤버를 구하면서 공연을 했지만, 둘 다 군대에 가면서는 그것마저 힘들어졌다. 당시 루시드 폴은 안성의 화학 공장에서 방위산업체 근무를 했는데, 퇴근하고 공연장으로 달려가면 리허설도 못하고 무대에 서기 일쑤였다. 결국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로 미선이는 활동을 중단했다.


유학, 그리고 ‘과학자 뮤지션’이라는 별명


미선이 활동 중단 후 ‘루시드 폴’이라는 솔로 프로젝트가 등장한 것은 2001년이다. 셀프 타이틀의 1집은 미선이 시절부터 협력해온 엔지니어 고기모와 함께 작업했다. 루시드 폴은 일 년 반 동안 주중에는 공장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녹음하기를 반복했다. 그는 “너무 힘들게 나왔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애착이 많이 가는 앨범”이라고 말한 바 있다.

 

1집은 간결하고 부드러운 연주와 보컬, 단어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골라낸 듯 세심하게 다듬은 가사가 조합된 음악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다만 루시드 폴이 밝힌 바에 따르면 1집은 미선이의 앨범보다 훨씬 덜 팔렸다고 한다. 또 미선이 시절보다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전 미선이의 팬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이듬해 루시드 폴은 영화 [버스, 정류장] 사운드트랙을 맡았다. 그리고 영화 개봉 전에 공개된 메인 테마 ‘그대 손으로’가 히트하면서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됐다. 당시 OST 앨범의 초동 주문량이 10,000장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5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치며 2주 만에 극장에서 물러났고, 영화보다 음악이 더 알려진 사례 중의 하나로 남았다.

 

그러나 루시드 폴이 전한 다음 소식은 새 앨범이 아닌 유학이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지만, 소속사와의 문제도 큰 이유가 됐다. 1집과 영화음악이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제대로 정산을 받지 못한 것이다. 또 그동안 신경을 덜 쓴 학업에 대한 미련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스웨덴 왕립공대 홈페이지에서 학비와 생활비, 숙소까지 제공한다는 연구원 모집 공고를 보고 떠나기로 했다. 그는 “스웨덴이 뭔가 미지의 나라로 보이기도 하고, 연구도 왠지 섹시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루시드 폴은 스웨덴에서 공부하면서도 음악을 계속했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악기와 장비들을 공수해와서 집에서 앨범을 준비했다. 2004년 스위스 로잔 연방공대로 자리를 옮겨서 박사 과정에 들어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국에 있었다면 퇴근하고 술 마시느라 바빴을 텐데, 혼자 있으니 남은 시간을 음악에 쏟기 좋았다고 한다.

 

2005년 루시드 폴의 두 번째 정규 앨범 [오, 사랑]이 나왔다. 전 소속사 때문에 상처를 받은 그는 원래 모든 제작을 혼자 하려고 했지만, 유희열의 설득으로 토이뮤직(지금의 안테나뮤직)과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토이뮤직 정동인 대표와 유희열은 “네가 앨범 내고 싶어지면 아무 때나 편하게 내면 된다”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후 루시드 폴은 줄곧 안테나 뮤직과 함께 해오고 있다.

 

2집의 화두는 제목 그대로 사랑이었다. 그러나 ‘물이 되는 꿈’,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들꽃을 보라’ 등, 특유의 치열한 작사로 인해 통속적이지 않은 사랑 노래가 되었다. 루시드 폴은 “2집을 통해 가사가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내가 다른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다”고 자평했다. 또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늘 자신의 보컬을 이펙터 뒤로 숨겼던 그가, 목소리를 전면으로 내놓기 시작한 앨범이기도 하다.

 

루시드 폴은 스위스에서 연구와 음악을 병행하면서, 틈틈이 곡을 써서 다음 앨범을 준비했다. 이전까지는 인맥을 총동원해 ‘품앗이’로 제작했다면, 이번에는 안테나뮤직의 탄탄한 지원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세션 팀을 꾸려 만들었다. 2007년 나온 3집 [국경의 밤]에는 뮤지션이자 과학자라는 다층적인 정체성, 해외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 고국에 대해 느끼는 향수 등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국경의 밤]은 초도 판매분이 매진되고,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등을 제치고 음반판매 1위를 기록하는 등, 당시 음반업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앞으로는 공부나 연구 아닌 음악만 할 것”

 

루시드 폴은 2008년 스위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에게 ‘박사 뮤지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된 것이 이 즈음이다. 이어 같은 해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했고, 미국의 제약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입사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루시드 폴은 2009년 “앞으로는 공부나 연구를 하지 않고 음악만 하겠다”며 미련없이 공부를 접었다. 주위에서, 심지어 음악인 동료들까지도 “지금까지 쌓아온 학문적 성과가 아깝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2009년 2월 귀국을 택했다. 루시드 폴은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한 내상, 동물 실험을 하면서 느꼈던 정서적 불편 등이 가득 쌓이면서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의 말대로 ‘인생에서 중요한 카드 한 장’을 던진 셈이다.

 

네 번째 정규 앨범 [레 미제라블]은 루시드 폴이 전업 뮤지션의 길을 선언하고 만든 첫 앨범이다. 이번에는 곡 작업부터 녹음,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전 과정을 한국에서 시작하고 마친 결과물로, 12인조 오케스트라의 현악기를 편성해 풍성한 사운드를 만드는 등의 시도도 했다.

앨범의 타이틀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따왔다. 루시드 폴은 “소설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 작품에 나온 것처럼 불행하게 살고 죽어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평범한 사람’, ‘레 미제라블’은 각각 용산 참사와 5.18 민주화 운동이 모티브가 됐다. 루시드 폴은 중학교 때 독서실에서 총선·대선 라디오 방송을 챙겨 듣고, 한때 신문을 9종이나 구독할 만큼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과 신념이 확고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음악에 전념하기로 한 뒤 루시드 폴은 본격적으로 음악적 외연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5집 [아름다운 날들]은 그가 예전부터 열렬하게 애정을 드러내 온 브라질 쿠바 등 남미 음악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앨범이다. 이를 위해 플루트와 트롬본 외에도 탄탄(TanTan)이나 판데이루(Pandeiro) 같은 악기를 배치하기도 했다. 6집 [꽃은 말이 없다]에서는 악기를 최소화한 어쿠스틱 편성으로 작업하면서, 특히 기타의 자연스러운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 주력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기타를 사용했으며, 녹음용 마이크를 열 가지 넘게 테스트하는 등 세밀한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제주도에서의 삶과 음악

 

2014년 루시드 폴은 인생에서 또 한 번의 ‘중요한 카드’를 던지게 된다. 결혼을 하고, 같은 해 제주도로 이주한 것이다. 그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몰랐던 나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며 나는 평생을 도시에서 보냈지만, 바다나 산이 더 좋았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했다.

 

제주도에 터를 잡은 루시드 폴은 농사 짓는 마을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귤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박사 뮤지션’에 ‘농부 뮤지션’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해진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시골 생활을 하며 매일 흙을 밟고,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일상은 자연스럽게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2015년 공개된 7집 [누군가를 위한,]에서 이런 영향이 잘 드러난다.

 

[누군가를 위한,]은 루시드 폴은 직접 쓴 동화 <푸른 연꽃>과 음반이 패키지로 묶여 발매돼 눈길을 끌었다. 동화의 사운드트랙을 겸한 앨범인 셈이다. 그는 동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동화를 쓰게 됐다고 한다. 그 외에 우주와 바다, 로드킬을 당한 동물, 제주 4.3 사건과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 반려견 등의 이야기가 총 15곡에 담겼다. 그는 “지난 2년간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한 기록”이라고 앨범을 설명했다.

 

7집은 대중음악에서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프로모션으로도 유명해졌다. 홈쇼핑 방송을 통해 직접 재배한 귤과 앨범을 한정 패키지로 판매한 것으로, 이는 루시드 폴과 유희열이 국수를 먹다가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한다. 유희열과 정재형, 박새별, 이진아, 페퍼톤스 등 안테나 뮤직 소속의 모든 동료가 총출동한 방송은 팬들에게 큰 즐거움을 줬고, 폭발적인 화제 속에서 9분 만에 전량이 매진됐다. 루시드 폴은 “내가 드릴 수 있는,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을 한데 묶고 싶었다”고 말했다.

 

루시드 폴은 7집 발표 이후 귤밭에 2층 오두막을 직접 만들었다. 오두막 1층은 농기구 창고, ‘고요연구소’라는 이름이 붙은 2층은 음악 작업실이 되었다. 그의 첫 에세이이자 8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는 여름에 새소리, 벌레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작업실에서 모든 과정이 이뤄졌다. 에세이는 루시드 폴이 원고지에 직접 손으로 쓴 글을 엮었다.

 

루시드 폴은 4집의 ‘문수의 비밀’처럼 자신의 반려견들 이야기를 종종 곡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9집 [너와 나]는 반려견 '보현'의 이야기가 앨범 전체의 테마가 된 포토 에세이집으로 발매됐다. 루시드 폴은 보현이 내는 소리들을 채집하고, 그걸 가공해서 음악으로 만드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손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기타를 잡지 못하게 된 게 오히려 계기가 됐다. 그도 스스로 ‘이게 진짜 음악이 될 수 있는 건가’ 하는 반신반의를 했지만, 작업이 이어지면서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보현은 앨범 크레디트에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고, 따로 저작권료 통장도 가지고 있다.

 

손이 회복되고 다시 기타를 잡게 되면서, 10집 [목소리와 기타]는 제목 그대로 목소리와 기타로만 여러 가지의 결을 드러낸 앨범이 됐다. 어쿠스틱 음악을 한다는 이미지가 강한 루시드 폴이지만, 모든 곡을 목소리와 기타로만 채운 것은 처음이다. 그는 “목소리와 기타가 서로에게만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유독 외로운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루시드 폴은 자신은 음악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미선이로 데뷔하기 전부터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음악을 오래하고 싶은 사람이고, 오래 할 것이라는 다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정규 앨범의 주기를 2년을 넘기지 않는 규칙을 스스로 세우고, 조용하고도 확실하게 그것을 지켜가고 있는 중이다. 브라질의 전설적인 뮤지션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디스코그래피를 갖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한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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