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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8
by 최승우

1990s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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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28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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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끈 뮤지션을 꼽는다면,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를 포함시켜도 될 것 같다. 이들의 음악은 당시 기준으로 조금은 생소했지만 세련됐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강한 중독성으로 동시대 사람들의 감성을 묘하게 건드렸다. 그렇게 조용하지만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낸 롤러코스터의 음악은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롤러코스터라는 이름은 어떤 특정 취향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2000년을 전후로 이십 대를 보낸 세대라면 공감하는 이가 많지 않을까 싶다. “롤러코스터 음악 좋아합니다”는 말 한마디로 정서적 공감대가 생기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활동기간 동안, 이 밴드가 남긴 임팩트는 그만큼 소소한 듯 묵직했다.

 

롤러코스터의 시작

 

롤러코스터의 리더 지누(본명 최진우)는 중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음악을 시작한 케이스다. 그는 원래 작곡가로 데뷔하고자 했고, 군대에서 꾸준하게 곡을 쓰며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유희열의 소개로 만난 이승환의 제안으로 자신의 앨범을 내면서 데뷔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 지누의 데뷔 앨범 [JINU # JOKE], 1997년 2집 [Crossover]는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누는 1집에 상당한 제작비를 들인 이승환에게 미안해서 2집을 원맨 밴드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이때 혼자 하는 작업에 매력을 느낀 게 이후 롤러코스터의 바탕이 되었다. 솔로 앨범에서 실패를 맛본 지누는 뭔가 다른 형태의 음악을 해보자 싶어서 밴드를 구상했고, 싱어송라이터이자 건반 연주까지 가능한 조원선을 멤버로 맞아들였다.

 

당시 조원선의 상황도 지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원선은 고등학교 때 클래식을 전공하기 위해 피아노를 치다가 밴드 1990’s로 음악을 시작했다. 1992년 소니뮤직 오디션에서 발탁된 6명과 옴니버스 앨범을 내면서 정식 데뷔했고, 윤종신, 이현우, 이승환, 윤상 등의 앨범에서 코러스로 활동했다. 그녀는 잠깐의 일본 유학에서 큰 자극을 받고 돌아와서 솔로 앨범을 내려 했지만, 데모를 들고 돌아다녀도 변변한 성과가 없어서 답답해하던 참이었다.

 

지누와 조원선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팀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먼저 기본적인 준비를 마치고 제작사를 찾던 시기에 이상순이 합류, 3인조 밴드 롤러코스터가 탄생했다. 이상순은 고등학교 때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음악을 듣고 기타를 잡았으며, 록 밴드 데이비 블루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뱅크, 홍경민, 이선희 등의 앨범에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지누 역시 1991년에 일본에서 열린 세계 대학생 음악축제에서 기타리스트로 상을 받을 만큼 출중한 기타리스트였지만, 롤러코스터의 음악에 좀 더 어울리는 이상순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베이스를 맡게 됐다.

 

제작사를 찾지 못해 홈 레코딩을 하다

 

롤러코스터의 데뷔 앨범이 나왔을 때 화제가 됐던 건 음악뿐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홈 레코딩(home recording) 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사실상 첫 번째 뮤지션이라는 점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물론 롤러코스터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런 ‘DIY’ 방식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반적인 메이저 가요와 거리가 멀고 생소했던 롤러코스터의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제작사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원선은 “제작사를 알아보는 데만 2~3년이 걸렸다. 다들 지쳤지만 작업한 게 아까우니까 앨범 하나만 내고 해체하자는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멤버들은 “우리끼리 할 수 있는 데까지 퀄리티 있는 걸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조원선의 반지하 원룸에서 녹음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디지털 장비와 기술이 발달해서 홈 레코딩이 일반화됐지만, 그때만 해도 홈 레코딩은 파격적인 시도를 넘어 전례가 드문 것이었다. 소음을 막기 위해 문틈과 창문을 이불로 막기도 하고, 앰프를 옷장에 넣고 담요로 덮는 등 아이디어를 총동원했다. 장비는 친분이 있는 뮤지션들에게서 빌려왔다. 믹서는 이승환, 녹음기는 유희열, 마이크는 윤종신의 것을 쓰는 식이었다. 특히 지누가 과거에 혼자 앨범을 만들면서 장비와 녹음에 대해 지식을 쌓은 게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았고, 결국 모든 앨범 작업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이상순은 “물론 지금 들어보면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에 비해 떨어지지만, 그때는 일반적인 가요 음반들과 완전히 다른 게 나와서 ‘이런 것도 좋겠다’ 싶었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녹음한 앨범은 이승환의 스튜디오에서 후반 마무리 작업을 거치고, 윤종신 측 매니지먼트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나왔다. 앨범 디자인도 멤버들이 직접 했다.

 

롤러코스터의 데뷔 앨범 1집 [Roller Coaster]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99년에 나왔다. 쿨하고 도회적인 스타일, 드라마틱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연주, 귀에 감기는 재지한 멜로디,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흥겨우면서도 쓸쓸한 정서 등은 당시의 대중음악 유행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메인 싱어송라이터 조원선의 건조하고 나른한 느낌, 탄탄한 리듬을 만들어 내는 이상순의 연주, 지누의 세련된 프로그래밍은 적재적소에서 시너지를 뿜어냈다.

 

그러나 멤버들은 앨범을 만드느라 진이 빠진 나머지 홍보를 할 여력도 없었고, 이제 그만하자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즈음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유희열이 “롤러코스터 노래가 계속 신청곡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전해줬고, 조금씩 반응을 체감하면서 멤버들은 몇 년 동안 서러웠던 걸 조금은 보상받았다고 한다. 이상순은 “롤러코스터가 했던 애시드 재즈 같은 장르를 좋아하지만 한국에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못 듣고 계시던 분들이 많았을 텐데, 우리는 마침 그런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 같다”고 돌아봤다.

 

그중에서도 ‘습관’은 라디오 청자들의 집중적인 사랑을 받으며 롤러코스터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다. 감정을 격하게 폭발시키지도, 한없이 깊은 슬픔으로 빠져들지도 않는 덤덤한 이별 노래였지만, 그 중독성은 한 번 들으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이후 아이유, 수지, 미노이 등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롤러코스터 스타일’, 그리고 전환점이 된 3집

 

롤러코스터는 이듬해 발표한 2집 [일상다반사]에서 역시 홈 레코딩 방식을 고수했는데, 지누는 “얼마든지 녹음실을 빌려서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밴드만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찾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또 주위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녹음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지누는 “우리의 ‘덤덤한’ 스타일을 몇 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기획자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저예산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원선은 2집에 대해 “1집과 동일한 장비를 사용했고 음악적으로 큰 변화는 없지만, 사운드는 더 좋아졌다”고 자평했다. 그 말대로 2집은 전반적으로 1집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간의 홈 레코딩 경험이 쌓이면서 퀄리티가 한결 정교해지고 견고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이른바 ‘롤러코스터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체성을 확실히 굳힌 앨범이다. ‘습관’만큼 두드러지는 히트곡은 없었지만, ‘너에게 보내는 노래’, ‘Love Virus’ 등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곡을 여럿 만들어 냈다.

 

2년 뒤 롤러코스터는 3집 [Absolute]에서 지금까지와는 크게 달라진 시도를 했다. 앨범의 거의 모든 수록곡에서 전자음을 내세웠다. 그럼에도 기존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균형을 잘 잡아서, 이질적이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일렉트로닉 팝 앨범이 완성됐다. 차갑고 댄서블한 리듬 위에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듯한 조원선의 보컬이 얹힌 타이틀 곡 ‘Last Scene’이 대표곡이다.

 

다만 [Absolute]는 좋은 쪽이든 아니든 밴드의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 앨범은 롤러코스터의 앨범 중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했는데, 지누의 말에 따르면 1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20만 장 이상이 나갔다는 언론 보도도 나온 적이 있으니, 당시 밴드로는 상당한 판매고를 올린 것은 틀림없다. 다만 이후의 음악적 방향에 대한 고민, 변화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누 역시 “3집 이후로 롤러코스터의 음악이 점점 복잡해졌다. 욕심이 생겨서 더 멋진 음악을 하려고 했는데, 대중과는 점점 멀어지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롤러코스터는 2004년 [Sunsik], 2006년 [Triangle]까지 두 해 간격으로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이들은 3집 이후 전자음과 댄서블한 리듬이 넘실대는 일렉트로닉 팝을 큰 줄기로 잡았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를 앞세운 음악적 완성도는 출중했지만, 예전 ‘습관’이나 ‘Last Scene’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곡을 뚜렷하게 배출하지는 못했다. 2집 타이틀처럼 변변치 않은 ‘일상다반사’를 건조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하게 표현하곤 했던, 팝 밴드로서의 매력은 다소 희박해진 것이다.

 

활동 중단과 멤버들의 개인 활동

 

2006년 내놓은 디지털 싱글 ‘유행가’는 현재까지 롤러코스터의 마지막 작품이다. 공식적으로 해체가 언급된 적은 없지만 사실상 활동 중단 상태다.

 

지누는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점점 동경이 없어지는데, 밴드 음악에 대한 동경이 점점 생기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조원선은 “해체냐 아니냐는 그냥 놔두고 싶다. 억지스럽게 마무리하는 것도 그렇고, ‘그때가 참 좋았다’고 남기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멤버들의 음악적 에너지가 소진되고 동기 부여가 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활동을 종료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순은 몇 년 전 한 매체에서 “대중음악을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음악만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롤러코스터 활동의 의미를 돌이켰다. 히트를 쥐어짜 내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고, 셋 모두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공연이든 뭐든 우리가 내키지 않는 곳에 억지로 가서 활동한 기억도 없고. 하고 싶은 것만 했다”고 말했다.

 

롤러코스터의 세 멤버는 현재 각자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지누는 전자음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면서 DJ, 프로듀서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최근에는 작곡가로 맹활약 중이다. 결혼 후 아이가 생겨서 수입이 일정치 않은 음악을 계속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브라운아이드걸스의 ‘Abracadabra’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앞길이 트였다고 한다. 아이돌 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받는 ‘Abracadabra’를 시작으로 f(x)의 ‘아이스크림’, 소녀시대의 ‘Show Show Show’ 등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히치하이커(Hitchhiker)라는 예명으로 자신의 앨범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조원선은 2009년 첫 솔로 앨범 [Swallow]를 발표했다. 그 뒤 윤종신, 윤상, 손성제, 에픽하이 등 여러 뮤지션의 앨범에 피처링이나 게스트 보컬로 참여했으며, 드라마와 영화음악에도 참여하고 있다. 2018년 존 박과의 듀엣곡 ‘서두르지 말아요’를 통해 9년 만에 자신의 작품을 공개했다.

 

이상순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가 2009년 귀국, 이듬해 김동률과 베란다 프로젝트를 결성해 첫 앨범 [데이 오프]를 발표했다. 이후 이효리와 결혼해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으며, 작곡가, 기타리스트, 프로듀서, DJ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2022년에는 데뷔 11년 만에 첫 솔로 EP [Leesangsoon]을 발표했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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