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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by 우정호

1990s 듀스 (DE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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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3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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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스(DEUX)는 타고난 송 메이커 이현도와 퍼포머로서 강점이 뚜렷한 김성재로 이뤄진 듀오다. 힙합, 뉴 잭 스윙, 훵크(Funk), 알앤비와 같은 ‘흑인 음악’을 표방했으며, 한국 힙합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들의 스타일리시한 패션은 당시 트렌드세터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2012년 시작된 랩 경연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의 거대한 반향은 힙합을 국내 가요 신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힙합이 대세’라는 말이 더 이상 마니아들의 자조적 언어가 아니게 될 즈음, 힙합에 대한 애호를 넘어 탐구의 영역으로 나아간 이들 역시 무수히 생겨났다. 자연스럽게도, 이들의 천착 지점은 ‘한국 힙합의 원조는 누구인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힙합의 원조는 누구인가? 1992년, 당시 가장 유명한 랩 송 ‘난 알아요’를 발표한 서태지인가? 1990년, ‘슬픈 마네킹’으로 랩이 가미된 댄스 음악, 이른바 랩 댄스를 선보인 현진영인가? 1989년, 나미와 붐붐의 ‘인디언 인형처럼’에서 탁한 랩을 쏟아내던 신철인가? ‘누가 먼저 랩을 시도했는가?’라는 편협한 시각을 들이댄다면 음표가 전무한 박자감 있는 내레이션으로 ‘김삿갓 삿갓 삿갓’을 외치던 홍서범도 있다.

 

‘랩’과 ‘힙합’의 구분조차 모호했던 1990년대 초가 아니라, 붐뱁’, ‘트랩’, ‘갱스터 랩’, ‘트립 합’과 같은 힙합의 세부 장르에 정통해한 2020년대의 대중가요 리스너들은 ‘한국 힙합 원조는 듀스’라며 입을 모은다.

 

듀스는 음악에 랩을 음악의 일부 도입했던 기존 한국 가수들과 달리, 다양한 플로우와 완벽한 라임 구사를 통해 대한민국 최초로 ‘한국 랩’의 지향점을 만들어 냈다. 뉴 잭 스윙, 힙합, 훵크(Funk), R&B, 슬로우 잼과 등을 효과적으로 도입해 ‘세련된 힙합’으로 변모시켜 국내에서 ‘블랙 뮤직’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데뷔 때부터 ‘정통 흑인 음악’을 내세운 힙합 개척자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활동 기간은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4장의 앨범(정규 3장 + 2.5집]으로 284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큰 인기를 구가했으며, ’나를 돌아봐‘, ’약한 남자‘, ’우리는‘, 여름 안에서’, ‘굴레를 벗어나’, ‘상처’와 같은 노래를 남겼다.

 

 

‘멋’의 대체어 듀스(DEUX)

 

1972년생 동갑내기 이현도와 김성재가 처음 만난 곳은 서울 상문고등학교다. 당시 상문고는 ‘단군 이래 최대 사학 비리’, ‘폭력과 구별 없는 체벌’ 같은 불명예들로 점철됐음에도 소위 강남 8학군에 속한 학교들 중 하나였다. 재학생 중엔 특히 유학파나 해외 주재원 자녀들이 많았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보라색 티셔츠에 게스 청바지, 바지 뒷주머니에는 수건을 꼽고 스케이 보드 운동화를 신은 전학생이 상문고 교문으로 들어왔다. 일본 동경 한국학교에서 전학 온 김성재였다. 잿빛 학교 분위기와 상반되는 이 화려한 전학생을 맞은 건, 학교의 거의 유일한 흑인 음악 마니아이자 또 다른 ‘별종’ 이현도였다. 

 

사춘기 이전부터 허비 행콕, 런 디엠씨(Run DMC), 마이클 잭슨에 심취해 브레이크 댄스를 추던 이현도와 유년기부터 유럽과 일본을 오가며 풍족한 문화적 혜택을 받은 김성재는 대번에 단짝이 됐다. 음악과 춤, 패션이라는 공통 화제는 이들을 깊게 결속시켰다. 이현도는 김성재를 흑인 음악으로 물들였고, 김성재는 팝이나 록, 일본 팝 음악을 이현도에게 전파했다. 

 

둘은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춤의 메카’로 불린 이태원 나이트클럽 문나이트를 통해 춤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어려서부터 브레이크 댄스에 깊게 빠졌던 이현도와 달리 김성재는 그때 브레이크 댄스를 처음 접했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자 김성재의 춤 실력은 이현도를 능가했다. 그건 타고난 재능이었다. 게다가 180cm 키에 마른 몸을 가진 김성재는 다른 사람과 같은 동작을 춰도 춤선이나 태가 훨씬 미적으로 보였다.

 

한편, 상문고등학교 특유의 복종-체벌 문화에 불응한 김성재는 근신 처분을 받게 됐다. 이를 계기로 학교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 이현도는 상문고를 떠나 안양예고 문예창작과로 전학했고, 김성재 역시 학교에서 몇 번의 징계를 더 당한 뒤 한인고로 옮겼다.

 

학교를 떠나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둘은 열아홉 살에 이미 문나이트에서 춤꾼으로 이름을 떨쳤다. 박남정, 도건우, 현진영, 철이와 미애, 양현석, 이주노, 박철우 같은 문나이트 출신 선배들처럼 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연예계 데뷔 기회가 찾아왔다.

 

1990년 데뷔한 ‘현진영과 와와’ 멤버로 댄스 파트를 맡아 활동하던 구준엽과 강원래가 군 입대를 앞두게 되자, 춤 실력과 스타일이 뛰어난 후배 김성재를 후임 ‘와와’ 멤버로 추천했다. 이후 김성재가 ‘와와’의 또 다른 멤버로 이현도를 추천했고 둘은 구준엽과 강원래에 이어 ‘현진영과 와와 2기’로 연예계 데뷔했다.

 

그러나 이 활동은 길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현진영과 와와 부산 공연 중 현진영이 무대 위에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마초 흡연 혐의였다. 이현도는 그 모습에 크게 실망했고, 현진영과 와와는 강제 해산됐다. 

 

표류할 틈도 없이 김성재는 대학 입시를 선택했고, 이현도는 음악에 눈을 떠 신디사이저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작사, 작곡,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독학으로 익혀 첫 곡 ‘너에게만’을 완성했다. 이현도의 작업실에 방문해 이 곡을 듣게 된 현진영은 프로듀서인 이수만에게 새 앨범에 넣자고 요청했고, ‘너에게만’은 1992년 발매된 현진영 2집 [NEW Dance 2]에 수록됐다.

 

태어나서 처음 만든 곡이 당대 톱 가수 앨범에 실리게 되자, 자신감이 붙은 이현도는 작곡에 더욱 매진했다. 그렇게 완성한 곡은 이현도와 김성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될 ‘나를 돌아봐’였다. 그즈음 이현도의 재능을 눈여겨 본 연예기획사들이 가수 데뷔를 제의하기도 했으나, ‘김성재와 둘이 아니면 안 된다’며 거절했다.

 

그 사이, 한양대 관광학과에 입학한 김성재에게 이현도는 ‘가수를 하자’고 제의했다. 이런저런 오디션을 거치던 중, 음반 제작 사업에 막 뛰어든 제작자 김동구를 만나 신생 기획사인 뮤즈 기획에서 데뷔를 준비했다. 이 신생 기획사는 월급도, 지원도, 체계도 없이 오직 ‘의리’만 있었다.

 

모든 걸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작사, 작곡, 편곡 작업은 물론이고 프로듀싱, A&R 역시 이현도가 전부 맡아야 했다. 미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김성재는 그룹의 비주얼과 이미지메이킹을 맡았고, 스타일링과 안무 역시 담당했다. 

 

1993년 초, 데뷔 앨범에 들어갈 곡들이 전부 완성되자, 그룹 이름을 정했다. 프랑스어로 '둘'을 뜻하는 단어 'deux(두)'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듀스(DEUX)'였다. 단순한 생각으로 지은 그 이름이 가요사에 영원히 남게 될 줄 아직 이들은 몰랐다. 

 

 

뉴 잭 스윙 시대를 알린 데뷔곡 '나를 돌아봐'

 

한편, 듀스가 데뷔를 준비하는 사이 가요 시장 판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댄스 음악과 랩을 결합한 ‘난 알아요’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현진영 역시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같은 해 10월 복귀하면서 힙합 기반의 뉴 잭 스윙을 내세웠다. 철이와 미애는 힙합에 가까운 댄스 음악 ‘너는 왜’를 선보였다. 랩과, 힙합, 댄스 음악이 본격적으로 가요계를 강타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가운데, 1993년 4월. 듀스는 데뷔 앨범 [Deux]를 발표했다. 한국 최초 힙합 아티스트의 등장이었다. 

 

듀스는 1980~90년대 초반, 바비 브라운, 베이비페이스, 테디 라일리가 주도하던 뉴 잭 스윙을 데뷔 앨범 [Deux]에 녹여 본격적으로 흑인 음악을 이식시켰다. 지극히 미국적인 감성과 국내 정서에 맞는 보컬 멜로디와 가사를 매치시킨 곡들은 음악성과 대중성을 둘 다 정조준했다. 

 

타이틀곡은 바비 브라운의 그림자가 드리운 뉴 잭 스윙 스타일 힙합곡 ‘나를 돌아봐’였다. 본토 스타일에 가까운 음악과 이현도 특유의 감성이 살아있는 가사의 융화는 한국 힙합의 프로토타입이 되기에 충분했다. 과도하게 보컬 기교를 부리지 않은 이현도와 김성재의 담백한 보컬 컬러 조차 멋으로 형상화됐다. 특히, 비보잉에 충실한 격렬하고 현란한 안무는 이 곡을 처음 접한 이들과 특히 춤꾼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이 밖에도 클래식한 알앤비 발라드 '알고 있었어', 멜로디에서 강점을 보인 '나의 바보 같은 이야기', 펑키한 베이스 라인이 곡을 이끄는 '매일 항상 언제나', 김성재가 작사에 참여한 본토 스타일 힙합 넘버 ‘이제’와 같은 곡들이 수록됐다.

 

그러나, 듀스가 혜성처럼 나타난 당대의 가수들처럼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앨범 발표 직후에도 기획사의 미진한 지원 탓에 방송 기회를 잡지 못하다 한 달쯤 지나서야 당시 신생 방송국인 SBS의 <초특급 꾸러기 대행진> 오프닝 무대에 섭외됐다. 

 

이 무대에서 듀스는 거의 스포츠에 가까운 격정적인 텀블링과 브레이크 댄스, 비트 박싱과 빠른 랩을 선보였다. 최양락, 이봉원, 신동엽 등 출연진들 역시 이들의 미래를 직감한 듯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이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비롯해 방송 3사 주요 프로그램 섭외가 이어졌다. 

 

1993년 여름엔 어디를 가도 ‘나를 돌아봐’가 들렸다. 듀스가 입었던 체크 남방과 힙합 바지는 청소년 사이에서 대유행했다. 특히 십대들에겐 이들의 스타일링을 흉내 내는 것이 멋의 척도가 됐다.

 

‘나를 돌아봐’는 7월 첫째 주가 돼서야 가요톱텐 10위에 올랐고, 9월 3주까지 꾸준히 10위권 안 성적을 기록했다. 1위를 기록하진 못했으나 7월 넷째 주 가요톱텐 최고 순위 4위까지 올랐다. 

데뷔 년도에 발매한 2집 '듀시즘(DEUXISM)'

 

‘흑인 음악으로 대중음악계를 흔들겠다’는 듀스의 포부는 휴식조차 없는 에너제틱 한 행보로 이어졌다. 1집 활동 종료 후 불과 두 달만인 1993년 12월 30일 두 번째 정규 앨범 [Deuxism]을 발표했다. 13개 트랙으로 구성한 2집 작업은 심지어 1집 방송 활동을 병행하면서 이뤄졌다.

 

전작에 이어 뉴 잭 스윙을 지향하면서도 가요풍 멜로디가 더욱 매끄럽게 접목돼 음악적인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 앨범을 통해 한글 가사 랩의 지향점을 제시한 이현도는 작사가로서나 작곡자로서 더욱 성숙해진 역량을 보였다. 후에 업타운이 된 정연준이 지난 앨범에 이어 보컬 디렉팅을 맡았다. 

 

타이틀곡은 임팩트 있는 후렴구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로 여전히 회자되는 뉴 잭 스윙 ‘우리는’으로 낙점됐다. ‘오에오 오에오에오’라는 도입부가 중독적인 한국 최초 마이애미 베이스 곡 ’약한 남자‘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됐다. 이 밖에도, 뉴 잭 스윙 ‘그대 지금 다시’, 슬로 잼 ‘빗속에서’ 같은 곡들 역시 수록됐다.

 

특히, 랩 록 넘버 ‘Go! Go! Go! with H2O’는 한국 가요 최초로 한글 가사 ‘라임’의 기본 틀을 제시한 곡으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 이미 지나갔고’, ‘어른이란 이름으로 힘든 직장 갖고’, ‘생활하면서 이미 뽀얀 얼굴은 갔고’와 같이 ‘고’에 라임을 맞춰 플로우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록밴드 H2O의 피처링으로 록 밴드 사운드를 도입해 실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힙합 넘버 ‘무제(無題)’에서는 ‘히비리 디비리 힙합’ 같이 의미 없는 음절을 통해 랩 운율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현도 자서전에 의하면 이 곡의 원제목은 ‘Hiphop Tip’이었으나, 당시 존재했던 음반 사전심의에서 ‘힙합’이라는 단어를 현진영의 마약 사건과 연관 지어 삭제를 명령하자 항의의 의미로 제목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듀스는 발매 이듬해인 1월부터 2집 활동을 시작했으며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상승세를 이어갔다. 94년 5월 첫째 주, SBS ’생방송 TV가요 20‘에서 타이틀곡 ‘우리는‘으로 데뷔 이후 처음 1위에 등극했다. 

 

인기에 힘입어 삼성전자 CF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고유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미니 오디오 ‘마이마이’의 광고에선 '약한 남자'가, 가라오케 플레이어 ‘CD-OK’에서는 '우리는'이 흘러나왔다. 또한 같은 해 7월, 첫 단독 콘서트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었다. 

 

 

‘여름 안에서’ 수록된 리믹스 앨범 [RHYTHM LIGHT BEAT BLACK]

 

이후에도 듀스의 행보는 ‘광폭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2집 활동이 종료된 지 불과 두 달 만인 1994년 9월 [Rhythm Light Beat Black [remix]]를 발표했다. 앞선 두 앨범의 히트곡들을 전부 더욱 ‘블랙 뮤직’스럽고 세련되게 편곡해 수록했다. 신곡을 포함 총 14곡을 실었다. 

 

특히, 이 앨범엔 발매 후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름마다 울려 퍼지는 송가 ‘여름 안에서’가 수록됐다. 화려하지 않지만 강한 임팩트와 큰 여운을 만드는 가사와 멜로디의 곡으로, 색소폰 솔로조차 행복감을 절정으로 이끄는 곡이다. 또한 이 앨범에는 장혜진의 피처링이 돋보이는 트랜스 장르 신곡 ‘떠나버려!’나 ‘영원의 노래’, ‘영웅에게’와 같은 곡들이 수록됐다. 

3집 [Force Deux], 그리고 듀스의 종장 

 

이듬해인 1995년 4월, 듀스는 세 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정규 앨범 [Force Deux]를 발매했다. 데뷔 앨범 발표 후 불과 2년 만에 내놓은 완성형 역작이었다.

 

타이틀곡은 지난 앨범들의 뉴 잭 스윙 타이틀곡 아성을 이어간 ‘굴레를 벗어나 (Mo' Funk Version)’였다. 더욱 강력한 훅과 완벽한 곡 밸런스로 무장했으며 듀스의 음악적 발전의 총집합이었다. ‘굴레를 벗어나 모든 위선을 벗자’는 메시지의 이 곡은 이현도 스스로도 자신의 최고작으로 꼽은 바 있다.

 

김성재의 솔로 보컬이 곡의 전면에 배치된 또 다른 뉴 잭 스윙 곡 ‘상처’ 역시 완성도가 뛰어난 앨범의 또 다른 히트곡이며, 이 앨범에는 이현도의 첫 작곡곡이자 현진영의 앨범에 수록된 바 있는 ‘너에게만’의 듀스 버전도 수록됐다. 

 

이 밖에도 재즈 힙합 넘버‘反芻 (반추)’, 서부 힙합 조류를 따르면서도 한글 라임을 제대로 살린 한국형 힙합곡 ’意識魂亂(의식 혼란)‘, 자메이카 랩(Jamaica rap)의 시도가 두드러지는 ’Nothing But A Party‘와 같은 곡들이 수록됐다.

 

이 앨범은 발매 전 선주문이 130만 장에 이를 정도로 기대를 모았으며, ’굴레를 벗어나‘는 SBS <생방송 TV 가요 20>에서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를 꺾고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이를 포함해 듀스는 이 곡으로 1995년 6월부터 7월까지 <생방송 TV 가요 20> 네 차례 정상을 차지했다.

 

데뷔 후 2년간 발표한 네 장의 앨범이 모두 성공한 이 그룹에서 상승가도밖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3집 활동 3개월 만인 6월 7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메시지를 발표했다.

 

100여 명이 몰린 여의도 63빌딩 기자회견장에서 듀스는 “무리한 스케줄 등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쳤다. 많은 책임감과 함께 방송 생활에 대한 회의 등으로 해체를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앞서 5월 말, 기획사와의 갈등 끝에 KBS <가요톱텐> 출연을 펑크 내면서 방송사로부터 1년간 출연 정지 중징계를 받은 상황이었다.

 

기자회견 당시 이현도는 “더 이상 가수 활동에 미련이 없다”고 밝혀 충격을 더했다. 알려진 바로는 4장의 앨범 발표로 28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동안 정산 금액은 턱없이 적었으며,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하며 격한 댄스를 소화하다 보니 몸 상태는 부상을 달고 사는 운동선수 수준으로 악화됐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해체에 ‘멤버 간 불화’가 원인이었다는 등 각종 루머가 나돌았다. 그러나 이현도는 시간이 흐른 후 한 인터뷰를 통해 “말 그대로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다”며 “성재가 전면에 나서 엔터테이너로 나서고, 저는 뒤에서 곡 써 주고 프로듀싱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브랜드가 생겼으면 했고, 전략적 해체에 가까웠다”고 밝혔다.

 

듀스는 해체 발표 한 달 후, 코엑스에서 열린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해체했다. 

 

김성재 솔로 데뷔에 이은 충격의 사망

 

‘불화로 인한 해체’ 같은 루머를 비웃듯 이현도와 김성재는 LA로 함께 떠났다. 전에 없던 휴식을 만끽하던 중 8월 예당음향(현 예당컴퍼니)으로부터 김성재의 솔로 앨범을 요청받았다. 앨범 프로듀싱과 작곡, 작사를 이현도가 맡았으며, 듀스 4집을 위해 준비했던 곡들에 새로운 곡들을 추가했다.

 

김성재 솔로 데뷔 앨범 [말하자면]이 완성됐다. 김성재가 엔터테이너로 나서고 이현도가 음악 디렉팅을 맡는 ‘듀스’의 또 다른 형태라고도 볼 수 있는 유닛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과 절망은 겨우 하루 차이로 교차했다.

 

1995년 11월, SBS <생방송 TV 가요 20>에서 김성재가 공식적인 첫 무대를 가진 바로 다음날 전 언론사가 김성재 기사로 도배됐다. 연예란이 아닌 사회란이었다. 제목은 ‘듀스 전 멤버 김성재 사망’. 방송 활동을 위해 미국에서 함께 온 공연팀과 묵고 있던 홍은동 그랜드 호텔 스위트룸에서 공연 하루 만에 돌연 사망한 것이다.

 

성공적인 데뷔 무대 후 들뜬 목소리 이현도에게 “다들 칭찬해주고 좋았다”며 전화를 걸어온 김성재에게 “정말 잘했다”며 기쁘게 답했던 이현도는 몇 시간 만에 일어난 비보를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김성재의 미스테리한 죽음으로 듀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현도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성재와 한 번도 의견이 어긋난 적이 없었다. 곡을 만들고 고를 때도 늘 마음이 잘 맞았다. 듀스는 우리 둘이서 하나로 완벽히 잘 맞아 들어간 팀이었다” 

 

 

그 이후 

 

김성재 죽음 이후 실의에 빠진 이현도는 미국에서 1년여 간의 칩거 이후, 1996년 [DO IT]을 발표하며 타아틀곡 ‘사자후’와 함께 솔로로 재기했다.

 

이듬해인 1997년 3월, 듀스의 베스트앨범이자 마지막 음반인 [Deux Forever [compilation]]아 발매됐다. 김성재 솔로 데뷔 성공 후 계획 중이었던 듀스 4집 타이틀곡으로 내정됐던 ‘사랑, 두려움’이 수록됐다. 듀스의 지난 히트곡들이 전부 새로 믹싱 돼 실렸으며, 후반부에 이들이 함께했던 무대 분위기가 담겨 믹싱 된 ‘여름 안에서’는 특히 여운을 크게 남겼다. 활동이 전무했음에도, 이 앨범은 4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타이틀곡 '사랑, 두려움'은 가요톱10에서 4위까지 올랐다.

 

이후 가수 활동과 프로듀싱을 병행하던 이현도는 이현도는 구본승의 ‘너 하나만을 위해’, 지누션의 ‘말해줘’, 룰라의 ‘3! 4!’, 유승준의 ‘열정’ 등의 히트곡을 작곡했으며, 여전히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한편,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김성재 돌연사 의혹이 조명되는 듯 싶었으나 해당 방송 금지처분이 반복되는 등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사진출처=듀스, 엠넷, 스포츠서울]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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