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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5
by 최승우

1970s 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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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05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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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에서 한영애와 비슷한 뮤지션은 아무도 없다. 그저 ‘노래 잘하는 가수’는 그녀에게 온당한 평가가 아니다. 한영애는 록과 블루스, 포크 등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아우라 안에 집어넣는 보컬리스트이자,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이끄는 퍼포머다.

 

 

‘카리스마’. 다분히 진부한 단어지만, 한영애에게 그만큼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사석에서는 젠틀하며 팬들에게 친절하다고 알려졌지만, 노래를 할 때의 주술적인 마력은 카리스마라는 어휘 아니면 표현이 힘들다. 무대 위의 그녀에게는 말도 붙이기 힘들었다는 증언도 종종 들을 수 있다.

 

국내 여성 뮤지션의 계보를 살펴보면, 한영애의 등장은 파격적인 분기점이었다. 거칠고 쓸쓸하면서도 폭발적으로 몰아치는 그녀의 허스키 보이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여성 가수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확고한 음색과 세계가 있는 현재 세대의 여성 뮤지션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영애의 영향력 안에 놓여 있다. 실제로 이하이, 정인, 백지영 등 한영애를 존경하거나 롤 모델로 꼽는다는 여성 뮤지션은 상당히 많다.

 

걷잡을 수 없는 열정 때문에 시작한 노래

 

한영애는 “나는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아니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언니가 듣는 비틀즈의 음악을 어깨 너머로 듣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언니도 딱히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클래식 기타 레슨에 갔다가 지루해서 그만두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는 학생이었고, 혼자 있으면서 공상하는 시간이 많았다. 풀밭에 누워서 ‘하늘은 왜 푸른색일까’ 하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어머니에게 “네가 두 살인가 세 살 때쯤 동네사람들 모인 곳에 데려가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또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합창 대회에 네가 꼭 필요하다”고 찾아오기도 했고, 중·고등학교 때 국군 장병 위문공연을 가면 꼭 뽑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영애가 처음부터 음악을 자신의 길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정체 모를 열정이 그때부터 있었다. 그녀는 “그런 걸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쏟아야 할까, 뭘 해야 이런 감정을 해소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했다”고 돌아봤다.

 

한영애가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한 것은 재수생 시절이다.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친구의 선배가 운영하던 신촌 카페에서 일했는데, 음악도 틀고 손님이 없을 땐 심심풀이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 그녀는 “아마도 김민기나 양희은, 멜라니 샤프카(Melanie Safka)의 노래였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어느새 “신촌에 희한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여자애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게 계기가 되어 1976년부터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홀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혼성 노래모임 해바라기를 이끌던 김의철의 눈에 띈 것이 그 즈음이다.

 

한영애는 1977년 해바라기 1집, 1979년 2집에 참여했다. 그때만 해도 노래를 계속할 것인지, 음악이 자신에게 맞는 것인지 등의 개념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녀는 해바라기의 음악에 답답함을 느꼈다. 당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등을 들으며 록과 일렉트릭 기타에 흥미가 생겼지만, 포크 그룹인 해바라기에서는 스트레이트하고 감성을 죽이는 스타일로 목소리를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한영애는 “그때는 내가 갖고 있는 감성, 정서, 소리 등을 사분의 일 정도밖에 내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한영애가 해바라기 활동을 하다가 연극으로 눈을 돌린 것도 이런 ‘샤우트의 꿈틀거림’이 이유였다 록 뮤지컬을 하면 마음대로 소리를 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77년 12월 연극 <덧치맨>으로 데뷔했고, 1978년 자유극장에 정식 입단했다. 정식으로 배우 교육을 받은 게 아니라 혹독하게 배웠다. 새벽부터 전단지를 뿌리고, 오후에 다시 나가서 포스터를 붙이고, 저녁에 연습을 시작하는 생활을 몇 년 동안 했다.

 

8년 동안 연극을 했지만 그럼에도 한영애는 내면에 계속 무언가 쌓이는 걸 느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방황했다. 한영애는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나를 계속 살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갈증을 느끼고,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스스로를 계속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누구 없소’, 그리고 인기 가수가 되다

 

한영애가 노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삼십 대에 접어든 1985년이다. 그 즈음 만난 해바라기의 이정선도 “노래해야 하는 애가 왜 이러고 다니냐”라고 타박했다. 그렇게 해서 발표한 것이 1986년 데뷔 앨범 [여울목]이다. 그때부터 마음가짐도 확실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무대인으로서 살다 죽어야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같은 해 한영애는, 이정선이 주축이 된 블루스 프로젝트인 신촌블루스에 참여, 한영애는 1988년 신촌블루스의 1집 [그대 없는 거리]에 보컬로 이름을 올렸다. 이광조, 김현식과 함께였다. 당시 엄인호와 이정선은 이미 자신들의 영역이 확고한 뮤지션이었고, 이광조와 김현식은 이름이 알려진 스타였다. 한영애만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시 신촌블루스의 공연을 보고 난 관객들은 전부 “한영애가 대체 누구야?”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한영애는 1집을 제작할 당시 기획자의 선곡과 방향성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내부에서 뭔가 소리가 남아도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2집은 온전히 자신이 기획하기로 결심했고, 김수철에게 프로듀서 겸 베이시스트 송홍섭을 소개받았다. 이후 송홍섭은 한영애의 음악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 중 한 명이 되었다. 또 유재하도 자신의 곡을 주었고, 녹음할 때는 부르지도 않은 김현식, 전인권, 윤명운 같은 동료들이 몰려와서 코러스를 자청했다.

 

한영애는 2집을 만들 당시에 대해 “그때는 오로지 음악만 생각해서 뭔가 에피소드가 나올 틈이 없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치열하고 즐거웠다”고 돌아봤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88년 탄생한 2집 [바라본다]는 한영애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이 되었다. 그녀는 블루스와 록, 포크까지 다채로운 스타일을 자신의 일관된 아우라로 끌어안는 장악력을 선보였다. 윤명운이 작곡한 ‘누구 없소’를 비롯해 ‘코뿔소’, ‘루씰’, ‘바라본다’ 등 한영애의 대표곡이 이 앨범에 대거 수록돼 있다.

 

2집은 상업적으로도 상당한 판매고를 올렸고, 한영애는 단번에 인기 가수가 되었다. KBS의 인기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에서 이례적으로 한영애에게 1회 방영분을 통째로 할애할 정도였다. 카페마다 이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틀었고, 사람들은 “와, 한영애다”를 연발했다. 한영애는 이런 인기를 자신만 체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는 공연이 끝나면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산에 올랐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인기 가수였다는 걸 딱 십 년 지나서야 알았다”고 말했다.

 

세 번째 정규앨범 [한영애 1992]는 2집으로부터 4년이 지나서 나왔다. 전작에서 성공을 거둔 인기 가수라면 최대한 많은 앨범을 내고, 차트의 성공을 쥐어짜는 당시의 관행으로 보면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 셈이다.

 

2집에 이어 송홍섭이 프로듀싱한 3집은 전작의 여운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경함을 던졌다. 재즈를 시도하는가 하면, 좀 더 매끄러운 팝 성향의 곡도 수록됐다. 전반적으로 이 앨범은 변화와 새로운 시도의 통로에 놓인 과도기적 작품으로 꼽힌다. 그녀는 “나는 서서히 변했는데, 앨범을 너무 띄엄띄엄 내다보니 사람들이 변화가 감당이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3집에는 한영애 최초의 자작곡 ‘말도 안 돼’를 비롯해, 또 다른 대표곡이 된 ‘조율’이 수록됐다. 한돌이 작곡한 ‘조율’의 원곡은 원래 서정적인 분위기였는데, 한영애는 ‘질량을 크게 하고 싶은 마음’에 강렬하게 바꾸어놓았다. 그녀는 “한돌 씨가 ‘한영애니까 믿고 맏긴다’고 해서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고 밝혔다.

 

이듬해에는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공연 실황 앨범 [아.우.성 Live]를 발표했다. 한영애와 공연을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처럼 매번 강렬하고 독특한 무대를 보여주는 뮤지션은 드물다. ‘소리의 마녀’, ‘주술적인 카리스마’ 등의 수식어는 상당부분 이런 라이브 무대에 기인한 것이다.

 

“한영애 선배님 공연은 현대 예술이자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크라잉넛 한경록의 말처럼, 연극적인 퍼포먼스와 다양한 무대 장치는 한영애 공연의 시그니처다. 반대로 모든 비주얼 요소를 배제하고 음악으로만 이미지를 표현하는 ‘미니멀리즘’ 연출을 하기도 한다. 한영애 스스로도 “연극을 했던 버릇 때문인지, 내가 하고자 하는 노래가 제스처, 무브먼트 등을 통해서 관중에게 어떤 감흥을 전달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공연의 흐름을 깰 수 있는 게스트도 최대한 자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우.성 Live]는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라이브 앨범 1세대로 평가받는다. 특히 신대철(기타), 신윤철(기타), 김효국(건반), 황수권(건반), 송홍섭(베이스), 배수연(드럼)이라는 당대 최고 세션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역사적인 앨범이기도 하다.

거듭나기 위한 변화와 실험

 

한영애는 비교적 과작(寡作) 뮤지션이다. 그나마도 작품 사이의 기간이 일정하지 않은 편이다. 네 번째 정규 앨범 4집 [불어오라 바람아]도 3집 이후 5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음악은 그 시간만큼 한결 원숙해진 면모를 보였다.

 

한영애는 4집에 대해 “정서적인 면에서 색다르게 시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를 위해 선택한 파트너는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이병우였다. 또 한 곡을 빼고 한영애가 전곡을 직접 작사했으며, 작곡을 맡았다. 그동안 그녀가 자작곡에는 큰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눈에 띄는 부분이다.

 

[불어오라 바람아]는 세상을 투명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가사, 여유로운 보컬이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앨범으로, 상업적인 성과는 저조했지만 평단에서는 한영애가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된 앨범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영애 본인도 개인적으로 상당한 애착이 가는 앨범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의도대로 이병우의 기타와 목소리를 제대로 밀착시키지 못한 건 아쉬운 부분”이라고 꼽았다.

 

한영애는 1999년 5집 [난다 난다 난·다]에서 보다 과감한 실험을 했다. 이전까지 바탕을 두고 있던 포크와 록, 블루스를 벗어나서 트로트와 레게 등 다양한 스타일을 비틀어 넣었다. 특히 앨범 전반을 감싸고 있는 전자음은 기존 앨범에서 보이지 않았던 시도였다. 이는 공동 프로듀서를 맡은 신윤철, 그리고 ‘전자음 마스터’로 유명한 강호정의 손길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5집에서 무엇보다 많은 호응을 얻은 곡은 백설희의 1950년대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봄날은 간다’였다. 블루스 록 뮤지션의 이미지가 강했던 한영애가 옛날 트로트를 불렀다는 사실은 큰 화제를 모았고, 라디오에서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이 곡은 ‘누구 없소’, ‘조율’ 등에 이어 그녀의 공연장에서 관객들의 ‘떼창’을 이끌어내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봄날은 간다’는 한영애의 다음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팬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서 “그런 노래 좀 더 불러 달라”는 요청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한영애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선뜻 나설 수도 없어서 마음이 산란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층도 ‘봄날은 간다’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한영애는 먼저 서적과 복각판을 통해 1920~50년대의 노래를 300곡 이상 들으며 리스트를 만들었다. ‘21세기에 들어도 공감할 수 있는 가사’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것이 ‘사의 찬미’, ‘애수의 소야곡’, ‘외로운 가로등’ 등이다. 한영애는 ‘꺾고 굴리는’ 트로트 특유의 창법을 자제하고 간결하고 절제된 느낌으로 노래했고,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복숭아(달파란, 장영규, 방준석, 이병훈)는 이를 새로운 정취로 재탄생시켰다.

 

이렇게 해서 나온 2003년 나온 프로젝트 앨범 [Behind Time 1925~1955: A Memory Left At An Alley]는 트로트를 수준 높게 재해석한다는 발상 자체로 호평을 받았다. ‘외로운 가로등’으로 뮤직비디오도 제작했는데, 이는 한영애의 첫 번째 뮤직비디오다. 그녀의 팬이라는 봉준호 감독이 연출을 맡아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갈수록 무대가 좋아진다.”

 

한영애는 음악 활동이 뜸했던 2002년부터 2009년까지 EBS FM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의 진행을 7년간 맡았다. 2008년 한국방송대상에서는 진행자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폐지 방침이 알려지자 청취자들이 폐지 반대 1인 시위를 하고, 문화계 인사들이 EBS에 폐지를 반대하는 항의 서한을 전달할 만큼 고급 교양 프로그램으로 사랑받았다.

 

한영애는 라디오가 자신을 바꿔놓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십 대 때는 ‘셀프 왕따’를 할 정도로 사람을 만나지 않는 성격인데,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동안 음악 활동을 소홀히 했는데, 이제 많이 노래하고 싶다”고 말한 한영애는 2012년 MBC <나는 가수다>에 출했다. 그녀는 양희은, 전인권, 이문세, 밥 딜런, 보니 엠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며, 한영애라는 이름이 생소한 십 대 팬들까지 매료시켰다. 그 뒤 “지금까지의 작업 스타일을 벗어나서 남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소통의 앨범을 만들고 싶다”며 내놓은 앨범이 2014년의 6집 [샤키포]다.

 

6집은 5집에 이어 일렉트로닉의 색채가 좀 더 두드러진 앨범이다. 한영애의 20년 지기인 황경신 작가가 전곡의 작사를 맡았는데, 지금까지의 앨범 중에서 희망의 정서를 가장 직선적으로 담았다. 이런 변화가 특유의 카리스마적인 에너지를 애매하게 만들었다는 떨떠름한 반응이 있는 반면, 실험과 개성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녀가 변화의 의지를 보이며, 음악 활동에 더 힘을 쏟겠다는 의미를 실은 앨범임은 분명하다.

 

“갈수록 무대가 좋아진다”는 한영애는 그 말대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예전보다 더 다양한 무대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홍대 인근의 클럽들에서 열리는 타운형 페스티벌 ‘라이브 클럽데이’에 서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한경록의 생일잔치에서 시작된 축제 ‘경록절’에서 크라잉넛과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한영애의 팬들은 그녀를 ‘나무님’이라고 부른다. 오로지 무대 위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음악을 해왔다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고목 같은 그녀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별명이 아닌가 한다.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닌 베테랑이 언제든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사람에게 위안이 될 것이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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