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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4
by 최승우

1990s 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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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14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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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은 폭발적인 보컬리스트도 아니고, 만드는 음악은 소박하다. 그럼에도 기교도 트릭도 없는 그 담담함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트렌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평범한 듯하지만 신파적이지 않고, 그런 보편적인 감동에 겸연쩍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게 김광진의 음악이 지닌 마력이다.

 

절묘한 우연과 인연으로 데뷔하다

 

1948년 개원한 지성소아청소년과의원은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인천 전체에 소아과가 단 두 곳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천 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지성소아과에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김광진은 지성소아과의 원장인 김관철 씨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이들의 정서와 인성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김광진의 어머니는 일곱 남매가 모두 악기를 배우도록 했고, 석 달에 한 번씩 가족들이 한데 모여 가족음악회를 열었다. 김광진도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그 덕분에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을 더 가깝게 접했다고 한다. 물론 빌리 조엘(Billy Joel), 엘튼 존(Elton John) 같은 팝 음악도 즐겨 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김광진이 음악인이 되고 싶어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중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채널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실용음악과를 염두에 뒀겠지만 그때는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김광진은 1982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면서도 음악에 대한 생각은 항상 머릿속에 있었다.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나갔다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대신 교내 가요제에서는 1등을 휩쓸며 이름을 날렸다. 4학년 때는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행사에서도 1등을 했는데, 당시 2등이 동물원의 김창기, 3등이 안치환이었다.

 

그 뒤 진로를 고민하던 김광진은 석사 과정을 준비를 했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MBA(미시간주립대 경영학)에 입학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침 1986년 무렵에 미디가 시중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공부하는 틈틈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김광진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해 “돌이켜보면 기막힌 우연과 인연의 연속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유학을 다녀와서 한 이화여대 학생을 소개받고 그녀에게 곡을 줬는데, 그 학생은 김광진의 곡으로 이화여대 가요제에서 1등을 했다. 그녀가 바로 나중에 김광진의 아내이자 음악적 파트너가 된 허승경 씨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한 가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SM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데뷔를 준비하던 한동준이었다. 그는 예전에 김광진이 만든 데모 테이프를 듣고 그에게 곡을 받고 싶었는데, 마침 김광진이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연히 허승경 씨의 노래를 듣고 자신이 찾던 그 작곡가라는 걸 직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김광진은 1991년 한동준 1집의 타이틀곡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로 작곡가로 데뷔했다.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는 폭발적으로 히트한 것은 아니었지만,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김광진도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자신의 앨범을 준비했다. 지금으로서는 이미지가 잘 연결되지 않지만, 자신도 포크 뮤지션이었던 SM 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 이수만은 포크와 발라드 음악에 관심이 상당했다. 이후 음악 시장의 판도가 크게 바뀌면서 산업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위해 아이돌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광진의 데뷔 앨범 [Virgin Flight]는 철저하게 실패를 맛봤다. 앨범이 잘될 줄 알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그는 수중에 있는 50만 원으로 3개월을 버티느라 집에서 칩거할 정도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는 일단 생계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1994년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로 입사했다. “증권맨이 왠지 멋있어 보이고 돈도 잘 벌 것 같았다”는 이유였다. 김광진은 “지금 생각하면 마케팅이나 광고 쪽이 더 적성에 맞았을 것 같다”고 돌아봤다.

 

 

신드롬을 일으킨 ‘마법의 성’, 고전이 되다

 

데뷔 앨범이 실패했지만 김광진은 한동준 2집에도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고, ‘너를 사랑해’가 성공하는 걸 보고 자신의 곡이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1집에서 편곡과 건반 연주로 인연을 맺은 박용준과 팀을 만들었다. 김광진과 박용준이 만든 팀의 이름은 ‘더 클래식’이 되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고전을 만들고 싶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작곡과 보컬은 대부분 김광진이 맡았으며, 박용준은 편곡과 오케스트레이션, 건반 연주를 담당했다. 원래는 박용준을 김광진에게 소개해준 이승환까지 세 명이서 프로젝트 앨범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승환이 “김광진과 박용준 둘이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며 빠졌다. 그 대신 이승환은 제작자의 위치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김광진은 “이승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음악을 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클래식의 1집 [더 클래식]은 1994년 나왔다. 당시 음악계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정점으로, 김건모, 신승훈 등이 밀리언셀러로서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넥스트, 공일오비, 듀스 등의 위상도 만만치 않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더 클래식처럼 소박한 음악을 하는 팀이 방송 차트 1위를 할 정도로 성공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들의 기교 없는 멜로디와 보컬, 담백한 편곡은 진부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적인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타이틀곡 ‘마법의 성’의 인기는 거의 신드롬에 가까웠다. 1990년대 최고의 국민노래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만큼 사랑을 받았다. 김광진은 “유명 게임 <페르시아의 왕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만화 주제곡 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노래는 앨범에 세 가지의 버전으로 수록됐는데, 김광진이 직접 부른 오리지널 버전, 이승환, 한동준, 장필순, 이소라, 윤종신 등과 함께 부른 싱 투게더 버전, 그리고 키드 버전이 그것이었다. 이중 김광진이 성당 합창단에서 우연히 찾은 14세의 중학생 백동우가 부른 키드 버전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동요 같은 멜로디, 판타지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신비하고 드라마틱한 분위기, 마이클 잭슨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변성기 전 소년의 미성은 그야말로 폭풍 감독을 선사했다.

 

‘마법의 성’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있으며, 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됐다. 한국에서 이 노래를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그들의 처음 바람대로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불후의 고전이 된 것이다.

 

단번에 인기 가수가 되면서 김광진은 회사에서도 유명인이 됐다. 그는 “그때는 하늘에 붕 떠서 사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당시의 기업 문화에서 겸업, 그것도 가수 활동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마침 ‘삶의 질’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심지어 사내 방송에서 특집을 내보내기도 했다. 김광진은 “늘 잠이 부족해서 점심시간에 탕비실에서 신문지 깔고 자기도 했지만, 회사 생활하면서 화제의 인물로 사는 것도 행복했다”고 돌아봤다.

 

1995년 2집 [The Classic 2]에서 더 클래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마법의 성’의 후광을 우려먹는 것을 피하고자 한 흔적이 뚜렷한 앨범으로, 특히 전작보다 박용준의 작곡 비중이 늘어나면서 김광진과는 또 다른 매력이 더해졌다. 2집은 1집 정도의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상업적으로 준수한 판매고를 기록했고, 전반적으로 1집보다 짜임새가 훨씬 탄탄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우야’, ‘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 ‘송가’ 등이 대표적인 수록곡이다.

 

그러나 더 클래식은 1997년 3집 [해피 아-워]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나름 필사적으로 만든 앨범임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사랑을 잊은 이야기’ 등의 곡이 다소 알려지긴 했으나, 1집과 2집에 훨씬 못 미치는 반응은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었다. 김광진은 김광진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 상당히 컸다”며 “홍보가 힘들다는 것을 절감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뼈아픈 좌절, 그리고 다시 금융인으로

 

더 클래식 활동은 끝났지만, 김광진은 작곡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이승환의 ‘덩크슛’, ‘내게’, ‘흑백영화처럼’,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 ‘기억해줘’ 등이 그의 작품이다. 1998년에는 이런 곡들을 모아서 재편곡해 부른 2집 [My Love, My Life]를 발표했다.

 

이즈음 김광진은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당시 외환위기의 여파로 상황이 어려워지기도 했고, ‘차라리 다 접고 음악만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의 3집 [It’s Me] 김광진이 전업 뮤지션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지 발표한 첫 앨범이다.

김광진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 말대로 3집은 블루스, 보사노바, 일렉트로닉 등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 앨범이나, 더 클래식 이후 아직 방향을 뚜렷하게 잡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대중적으로도 큰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3집은 ‘마법의 성’과 함께 김광진의 대표적인 명곡 ‘편지’를 탄생시켰다. 인연이 아닌 사람에게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는 내용의 유명한 가사는 허승경 씨가 작사했다. 실제로 연애 시절 그녀와 김광진, 그리고 다른 한 남자의 사이에서 있었던 사연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김광진은 “처음에는 옛날 서신 같은 고풍스러운 가사가 이상했는데, 녹음한 걸 차에서 듣다가 울었다”고 말했다. 이후 허승경 씨는 그의 앨범에서 자주 작사를 맡는 음악적 파트너가 되었다.

 

김광진은 2002년 네 번째 정규 앨범 [Solveig]를 발표했다. 스스로도 “정말 열심히 만들었다”고 자부할 만큼 야심작이었다. 이 앨범에서 그는 자신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소박하고 담백한 감성을 큰 스케일의 신화적 테마와 엮었다. “인생은 슬프고, 안타깝고,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김광진의 운명론적 세계관이 잘 드러난 앨범으로,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광진을 대표하는 곡이 ‘마법의 성’과 ‘편지’라면, 앨범 단위로는 [Solveig]를 꼽는 평이 적지 않다. 특히 더 클래식 활동이 중단된 뒤에도 그의 조력자로 줄곧 함께 해온 박용준의 뛰어난 편곡이 완성도를 더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4집은 김광진이 다시 증권가로 돌아가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혼신을 다해 앨범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없어서 좌절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음악을 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가 있는 가장으로서 불확실한 미래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부자산운용 펀드 매니저로 취업했다. 직장에서의 성과도 좋아서 ‘더 클래식 진주 찾기 펀드’를 출시해 전국 1000개 펀드 중 수익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8년에 5집 [Last Decade]를 발표했지만, 대부분 기존의 곡을 재녹음한 베스트 앨범의 형식이 가까웠다.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 것 같았다”

 

한동안 음악과 거리를 두고 살던 김광진이 다시 마음을 굳힌 것은 2009년이다. 그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이제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9년 동안 몸을 담은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서초동에 작은 개인 작업실을 마련하고 다시 악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 우연과 인연이 다시 찾아온 것은 이 즈음이다. 2011년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3’에서 김광진의 노래가 대거 불리면서, ‘편지’, ‘진심’, 동경소녀’, ‘여우야’ 등이 차트 역주행을 시작한 것이다. 김광진은 “축복이자 행운이었다. 섭섭했던 마음이 싹 날아갔다. 내 노래가 그래도 괜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기뻐했다. 특히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겼던 4집의 ‘동경소녀’를 버스커버스커가 불러서 차트 1위에 오르자, 김광진은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의욕을 얻은 김광진은 박용준에게 “더 클래식을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약 5년의 곡 작업을 거쳐서 17년 만인 2014년 더 클래식의 새로운 EP [Memory & A Step]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1990년대 더 클래식 팬들이 반가워할 향수를 소환하면서도, ‘추억팔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은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더 클래식 재결성 당시 김광진은 “금융인으로 다시 복귀할 생각은 없고, 조언만 가끔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에는 오랜만에 싱글 ‘지혜’, ‘배다리’를 발표했다. 허승경 씨와 합작한 ‘배다리’에서는 자신과 아내의 고향 인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2024년에는 ‘마법의 성’ 30주년을 맞아 특별한 공연을 하고 싶은 계획도 있다고 한다.

 

김광진은 “롤러코스터처럼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험이 반복되는 독특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부침이 심한 두 가지 분야(음악과 금융)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증명했고, 또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노래는 어느 시대든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다는, 단순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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