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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30
by 최승우

2010s 심규선 (Lu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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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30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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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음악에는 신파도, 과시도 없다. 그 대신 섬세함과 치밀함이 있다. 담담한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중저음, 문학의 영향이 짙은 가사와 곡 구성, 정갈한 편곡은 그녀를 전형적인 팝 발라드 뮤지션의 틀에서 매번 벗어나게 만들었다.     

 

“모든 예술은 뿌리가 같다”

 

심규선은 1986년 생, 부산 출신이다. 어린 시절에 대해 그녀는 ”집에 종이가 넘쳐나서 늘 쓰고 그리며 놀았다“고 말했다. 심규선의 할아버지는 가난한 어촌에서 태어나 혼자 힘으로 노력해서 법대까지 입학한, 선비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집안에는 늘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넘쳤다.

 

집에 있는 유리장에는 할아버지의 책이 잔뜩 꽂혀 있었는데, 그녀는 어른들 몰래 그걸 꺼내 보곤 했다. 그때처음 읽은 책이 셰익스피어 소설과 대백과사전이었다. 옛날 책이라 제본이 일본식이었고 글자가 세로로 인쇄돼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일명 ‘똥종이’라고 하는 투박한 종이의 촉감, 그 사이에서 후다닥 도망가는 작은 거미까지.” 그때는 어른들이 읽는 동화책이겠거니 했는데, 그 책들이 지금까지도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자신의 앨범을 볼 때마다 새삼 느낀다고 한다.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어릴 적부터 있었다. 여기에는 딸의 자존감을 높여준 아버지의 교육 방식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심규선은 “아빠가 어릴 때부터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성적표에 수우미양가 중 가가 찍혀도 혼이 안 났는데, 자신감이 없다든가 소극적이라고 적혀 있으면 정말 많이 혼났다”고 돌아봤다. 다만 그런 표현 욕구를 어떤 식으로 그걸 끄집어내고 풀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십대 때는 ‘모든 예술적 활동에 대해 관심만 가지고’ 보냈다.

 

그녀가 음악보다 먼저 꽂힌 것은 미술이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과 삶에 매료되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막상 해보니 미술은 잘 맞지 않았다. “데생 한 번 하는데 세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게 내 성향과 안 맞았다. 머리카락 많은 거 그리라면 죽을 것 같고.” 그런데 그 즈음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음악까지 기웃거리는 그녀에게 미술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큰 깨달음이 됐다. ‘모든 예술은 가지만 다를 뿐 뿌리가 같다’는 오귀스트 로댕의 말이다.

잊을 수 없는 은사님

심규선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카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활동명 ‘루시아(Lucia)’는 그녀의 세례명이다), 성가대 활동도 했다. 그런데 고1 때 신부님에게 떠밀려서 창작성가대회에 나갔다가 대상을 받으면서, 오디션이나 대회, 경쟁에 ’맛을 들여서’ 닥치는 대로 나가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오르는 게 너무 좋았다. 처음에는 구 단위에서 시 단위 대회로, 그러다가 전국 규모로 커졌다. 그 시절에 ‘슈퍼스타K’ 같은 게 있었다면 엄청 나갔을 것 같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그때 심규선은 집안 사정 때문에 학원을 다닐 형편이 아니었는데, 한 선생님이 몇 년 동안 무료 레슨을 해준 덕분에 계속 다닐 수 있었다. 또 그 선생님은 그녀에게 “아티스트니까 배고파도 괜찮다는 식으로 타협하지 마라. 네가 응당 받아야 할 대가와 스스로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심규선은 “그분이 나한테 왜 그렇게 해주셨는지 여쭤본 적이 없다. 지금도 모르겠다. 그분의 가르침은 음악을 끊거나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끈이 되어주었다”고 돌아봤다.

 

심규선이 처음으로 프로 뮤지션에 근접하게 된 계기는 2005년 MBC 대학가요제에 나가면서다. 그녀는 부산예술대학교와동의대학교 연합 혼성 밴드 ‘아스코(ASCORBIC ACID)’의 보컬로 참가해서 금상을 받았다.

 

그러나 심규선은 이전까지 TV에 나가거나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가요제 입상이 데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상 받은 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TV에  나오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나중에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기획사에서 연락을 받기도 했지만, 4인조 걸 그룹의 노래 파트를 맡으라는 말에 박차고 나왔다. “나는 내가 만든 노래들을 들고 갔는데, 그쪽에서는 내 얼굴 보고 성형 견적 내고 있으니 아예 대화가 안 됐다.”
 
그 뒤 심규선은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홍대 앞 재즈 클럽에서 공연 활동을 시작했다. 홍대 앞 클럽에서 노래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보컬의 ‘리미트’가 없는 재즈의 표현 방식이 좋았다. 그러나 재즈 클럽에서 노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그녀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실용음악 보컬 레슨 등을 하며 한동안 생계에 집중했다.

 

여성 뮤지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지워버리다

심규선의 데뷔 기회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찾아왔다. 그 즈음 UCC(User Created Contents)가 한참 유행했고, 그녀도 기타 치는 친구와 함께 뮤지컬 <시카고>의 ‘Roxie’를 부르는 모습을 찍어서 온라인에 올렸다. 심규선은 “뮤지컬 노래 영상 찍어서 1등 하면 홍콩 디즈니랜드 여행권 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돈은 없는데 디즈니랜드는 죽기 전에 한 번은 가봐야 한다는 생각에 응모했다”고 말했다. 이 영상은 몇 십만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상당한 화제가 됐고, 이를 본 파스텔 뮤직에서 그녀에게 앨범 발매를 제안했다.

심규선은 몇 개의 싱글을 발표한 뒤 곧바로 정규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에세이에서 제목을 따온 1집 [자기만의 방]은 작업 기간이 일 년이 넘게 소요됐고, 제작비도 많이 들었다. 이 앨범은 파스텔 뮤직의 간판 뮤지션이었던 에피톤 프로젝트(차세정)가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공동 프로젝트 형식이었는데, 그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심규선은 “서로 다른 스타일과 가치관을 가진 두 명의 뮤지션이 하나의 음반을 만든다는 게 ‘테러블’한 일이다. 나는 절대 그를 꺾지 못했고, 그 또한 나를 절대 꺾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작업을 계기로 에피톤 프로젝트는 심규선에게 각별한 음악적 동료가 되었다. “세정 오빠는 나를 세상에 오픈시킨 뮤지션이다. 싸우면서 미운 정도 들었다. 나중에 내가 첫 단독공연 할 때 오빠가 더 신나서 이것저것 선물 잔뜩 사다가 안겨주고, 뒤풀이에서 술도 제일 많이 마셨다.” 다만 그녀는 이 때의 경험 때문에 “만약 내가 다른 음악가와 협업하거나 밴드를 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진중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냥 필요하다고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은 좋은 곡과 탄탄한 완성도, 심규선의 섬세한 보컬로 호평을 받았지만, 에피톤 프로젝트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때는 어떤 게 나한테 맞고 안 맞고의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재즈, 펑키, 로킹한 음악은 해봤지만 팝 발라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또 남녀 뮤지션이 같이 작업하면 으레 남자 쪽이 곡을 전부 만들었으리라고 보는 세간의 편견도 작용했다. 심규선의 이름을 처음 확실하게 각인시킨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줄 건가요’ 역시 직접 작곡했음에도 에피톤 프로젝트의 곡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심규선은 “심지어 내 곡이 아니라도 나는 ‘노래의 마지막 해석자는 가수’라는 프라이드를 가지고 부른다. 그런데 ‘역시 에피톤 프로젝트의 감성이다!’ 같은 반응이 나오니 너무나 억울했다”고 말했다. 

이듬해 나온 EP [Décalcomanie]는 이런 오해와 편견을 지워버리겠다는 의지가 가감없이 드러난 앨범이다. EP임에도 무려 열 곡이 수록되어 사실상 정규 앨범이나 다름없는 이 앨범에서, 그녀는 프로듀서와 전곡의 작사/곡, 편곡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앨범 아트워크까지 세세하게 관여했다. 이 때문에 [Décalcomanie]를 심규선의 실질적인 데뷔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Décalcomanie]는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그녀의 음악적 특징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앨범이다. 극적이면서도 과하지 않은 멜로디, 기승전결이 확실한 곡의 전개, 명징한 가사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호흡을 입에 담았다가 뱉을 때의 디테일까지 목숨을 건다”는 심규선 밀도 높은 보컬이 더해졌다. [Décalcomanie]는 어느 정도 표준화된 팝 발라드의 형태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드라마틱한 서사적 구성까지 담아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작가”

 

심규선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두 장의 EP와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내는 왕성한 창작욕을 보였다. 그녀는 “일단 앨범을 내고 나면 바로 다음 작업을 생각한다. 머릿속에 쌓여 있는 계획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오해를 겪은 것도 이유가 됐다. 그녀는 “그런 부분이 현실과 달라지니까 속이 많이 탔다. 내 노래라는 걸 알리고 싶은 절박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친 탓인지, 2013년에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된 상황에서 공연을 하다가 실신하기도 했다.

심규선의 세 번째 정규 앨범 [Light & Shade]는 2014년과 2015년에 걸쳐 두 개의 앨범으로 발표됐다.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적인 테마를 두 개의 챕터에 담았는데, 챕터 1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챕터 2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3집은 가볍지 않은 사색적인 이야기를 연작 앨범이라는 시도로 내면서, 그녀가 작가로서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데뷔 이후 한 번도 뺴놓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신보를 내놓던 심규선은 2016년 처음으로 공백을 가졌다. 이 시기에 소속사와 분쟁을 겪으면서, 직접 회사를 설립해 홀로서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소속사명은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딴 ‘헤아릴 규’가 되었다.

 

이듬해인 2017년에는 루시아라는 예명을 벗고 심규선이라는 본명으로 새 소속사에서의 첫 작품 EP [파탈리테]를 발표했다. 그 뒤로 매년 싱글과 EP를 발표하고,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 작업을 하거나 매체 음악에 참여하는 등 조용하지만 뚜렷한 행보를 이어오는 중이다. 페스티벌 등 무대에도 꾸준히 오르며, 팬들과의 소통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2020년에는 데뷔 20주년 기념 연작 EP [월령: 上]과 [월령: 下]를 발표했으며, 2022년에는 에세이집 ‘밤의 끝을 알리는’을 펴내기도 했다.

 

사석에서의 심규선은 표정이 풍부하고 말투가 확고하다. 그만큼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있고, 주어진 선물 같은 재능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또 가수나 싱어송라이터보다는 작가로 불리고 싶다고 한다. “나는 단순히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다. 또 그걸 표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확고함은 심규선이 양질의 작품을 꾸준히 내눃으며, 누구보다 부지런한 아티스트로 꼽히게 된 동력이 아닐까 한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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