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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by 최승우

2000s 검정치마 (The Black Ski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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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0-10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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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2009년 사이는 한국 대중음악,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홍대 앞이 중심이 된 인디 신이 가장 활기 넘쳤던 시절이다. 양과 질과 다양성 면에서 모두 확장을 이뤘으며, 매체의 관심도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언니네이발관이 커리어 통틀어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이 이 즈음이며, 브로콜리 너마저, 장기하와 얼굴들, 에피톤 프로젝트, 국카스텐,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 거물 신인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도 이 시기다.

 

그중 검정치마는 가장 독보적으로 빛나는 보석 중 하나였다. 레트로와 힙의 교집합에 절묘하게 걸쳐 있는 음악, 청자의 마음을 찰나의 감으로 파고들 줄 아는 천재성, 모범생 같은 외모에 발칙하고 도발적인 위트, 훤칠한 키와 뉴요커의 댄디한 이미지 등은 사람들을 열광케 했고, 충성도 높은 강력한 팬덤을 빠르게 만들어냈다.

 

MTV를 사랑했던 소년, 기타를 사다

 

검정치마(본명 조휴일)가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열두 살 때인 1995년이다. 처음에는 두렵기도 하고 친구들과 헤어지기도 싫었는데, 막상 가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는 “그때 맛있는 거 먹고 재미있는 TV 보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는데, 그 두 가지가 다 충족됐다”고 회상했다.

 

미국에 간 뒤에 일 년 정도는 만화를 보면서 영어를 익혔고, 그 다음에는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MTV에 빠졌다. 너무 재미있어서 한때는 채널 열 개를 즐겨찾기 해놓고 온종일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뮤직비디오의 영상에 끌렸지만 점점 음악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용돈을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CD 열 장을 한꺼번에 샀다. 그중 처음으로 노래와 연주 파트를 분리해 들은 건 앨라니스 모리셋(Alanis  Morissette), 기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건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였다.

 

당시 집에는 아버지가 치던 클래식 기타가 있어서 그는 독학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겨우 C 코드를 익힐 즈음 삼촌이 한인 교회에서 버려진 어쿠스틱 기타를 가져다 주셨고, 어머니가 조그만 앰프를 사주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Billy Corgan)이 폼 나게 치는 깁슨 플라잉 V(Gibson Flying V) 같은 기타가 없는 현실에 짜증이 났다. 심지어 교회에 가면 일렉트릭 기타도 있고 드럼과 베이스도 있다는 말에 생전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기타를 사기로 결심했고, 점심을 걸러가며 800달러를 모았다. 모든 게 신기하고 궁금할 때라 배고픈 것도 몰랐다. 다만 조용히 지내던 외아들이 갑자기 기타를 산다고 하니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는데, 검정치마는 사흘간 밥을 안 먹거나 가출까지 감행해가며 허락을 얻어냈다. 그때까지 어떤 사고도 안 치고 순종적이었던 그의 일생 첫 번째 반항이었다고 한다.

 

검정치마가 살던 지역에는 한국 학생들이 많았다. 그도 한때는 한국 아이들과 어울렸고, 통 큰 바지와 커다란 장갑을 끼고 H.O.T의 ‘캔디’에 맞춰 춤을 추고 다녔다. 그런데 ‘나는 밴드를 하고 싶은데 계속 이러다가는 영어도 안 늘고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국 친구들을 멀리 했다. “말하자면 ‘셀프 왕따를 시킨 거다.” 그러다 부모님에게 말씀드려서 9학년(한국의 중학교 3학년) 때 아예 멀리 떨어진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곳에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적응하고 극복한 뒤부터는 ‘브라이언 조’로 전형적인 미국 틴에이저의 삶을 살았다.

 

당시 검정치마는 펑크 음악에 매료돼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가사 한 구절이나 록 스타의 인터뷰에서 읽은 허세 가득한 어록을 종교처럼 숭배했다. 그는 자신이 처음 음악을 시작할 당시의 정서나 사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고 돌아봤다. “훨씬 거칠었고, ‘록 음악 하면서 악당처럼 살다가 빨리 죽어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이십 대 중반까지도 했다.”

 

음악에 빠지는 바람에 대학 시절에는 학교에 이름만 걸어놓고 지냈다. ‘올 F’만 두 번을 받을 정도로 학업에는 뒷전이었고, 출석도 잘 안 하고 집에서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만들었다. 게다가 그떄까지만 해도 음악을 해서 뭐가 되어야겠다는 구체적인 인생 목표나 계획은 없었기에, 부모님도 걱정을 많이 했다. 그는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했다. “나는 좋아하고 잘하는 걸 꾸준히 하고 있는데 왜 주위에서는 몰라주나 싶어서 서운하고 고통스러웠다.”

 

검정치마는 2004년 뉴욕에서 3인조 밴드를 결성했는데, 이때부터 검정치마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는 멤버 문제 때문에 해체됐고, 그 뒤로는 줄곧 원맨 프로젝트의 형식이 되었다. 그는 “주변에 더 좋은 뮤지션이 있었다면 음악적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늘 있다”고 말했다.

 

 

한국행, 그리고 일 년 만에 달라진 반응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것은 2007년이다. 노브레인 등 한국의 펑크 음악을 접하면서 홍대 앞 인디 신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당시 그는 이미 300곡이 넘는 자작곡을 쌓아둔 상태였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와보니 자신의 음악을 알릴 기회도 없었고 라이브클럽 무대에 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겨우 무대에 서도 관객이 없는 평일 공연이었다. 결국 그는 실망감을 잔뜩 안은 채 3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검정치마는 “좌절하기보다는 ’한국 안 되겠네. 내 음악을 몰라보고‘라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검정치마는 그동안 만들어놓은 곡들을 다듬는 작업을 시작했다.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를 하는 친구의 차를 타고 긴 여정 도중 틈틈이 작업을 했고, 애리조나, 인디애나, 뉴욕 등의 지하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검정치마는 데뷔 앨범이 자신의 취향보다는 대중적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첫 한국행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곡을 추려내는데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것이 2009년 1집 [201]이다. ‘좋아해줘’, ‘강아지’, ‘Avant Garde Kim’, ‘Antifreeze’ 등 간결하고 직선적인 펑크를 바탕으로 로큰롤, 신스팝, 스카, 발라드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아우르는, 그러면서도 산만함 없이 일관된 색깔을 담아낸 흔치 않은 데뷔 앨범이었다.

 

앨범을 들고 다시 한국에 오자 반응은 일 년 전과는 정반대가 됐다. 검정치마는 그 해 최고의 신성으로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앨범 발매 2주만에 광주 MBC ‘난장’을 통해 공중파 무대에 나갔을 정도였다. 그 스스로도 “한국에서 밴드가 TV 무대에 서는 걸 본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방송 출연에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검정치마는 이런 반응에 대해 “타이밍이라는 게 따라줘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 내 기대치에는 못 미쳤지만 빨리 통했다고 생각한다”고 돌아봤다. 특히 1집의 ‘Antifreeze’는 지금도 어디서든 폭발적인 떼창을 이끌어내는, 검정치마의 대표곡이자 인디 신 최고의 올 타임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다.

 

공연 활동이 많아지면서 전태병(기타), 류준(기타), 임형준(기타), 샤샤(키보드), 임유진(키보드), 류영(베이스), 정경용(드럼) 등의 멤버로 밴드도 꾸렸다. 검정치마는 “실력보다는 여건 되는 사람을 선착순으로 영입했다”고 밝혔다. 그 때문에 밴드로서의 완성도는 투박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앨범의 풋풋한 로파이(Lo-fi) 질감에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많았다. 평단에서도 이견이 없어서 [201]은 2010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최우수 모던 록 부문을 수상했다.

“선을 하나 그었는데 그림이 완성됐다.”

 

검정치마는 2011년 2집 [Don`t You Worry Baby (I`m Only Swimming)]에 대해 한국에서 일 년 동안 활동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이별노래’, ‘무임승차’, ‘외아들’ 등 앨범 앞부분의 수록곡만으로도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데뷔 일 년 만에 인디 신의 스타가 된 이후, 검정치마는 소속사였던 루비살롱과 마찰을 겪었다. 루비살롱이 공연 및 음원 수익을 고의적으로 누락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결국 검정치마는 갤럭시 익스프레스, 텔레파시 등의 밴드와 함께 소속사와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2집은 이런 힘들고 막막한 상황에서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 앨범이다. 다만 “그때 피폐하고 힘들긴 했지만, 사람들의 생각만큼 비장한 것은 아니고 천연덕스러운 느낌으로 했다”고 밝혔다.

 

검정치마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불신에 가득 차 있었는데,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그때 엄태창 장인이 만든 클래식 기타를 충동적으로 샀다. 집에서 그걸 쳐봤는데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런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림으로 치면 선을 하나 그었을 뿐인데 그림이 완성된 셈”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2집은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둔 콘셉트 앨범이 되었다. 당시 그는 소속사가 없었기 때문에, 앨범은 뮤지션, 미술작가, 패션 디자이너 등이 모인 아티스트 공동체 ‘도기 리치(Doggy Rich)’의 도움으로 나왔다.

 

그는 2집을 검정치마가 아닌 조휴일의 이름으로 내는 것도 고민했다고 한다. 전작이 지닌 펑크의 에너지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어쿠스틱하고 미니멀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집은 가사가 멜로디를 실어나르는 기구였다면 2집은 반대가 된 것 같다. 일단 가사를 써놓은 다음 내가 거기에 익숙해지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또 레코딩에서도 깔끔한 퀄리티보다는 깨끗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음역대를 의도했다. 그만큼 팬들 사이에서 취향을 타고 호불호가 꽤 갈린 편이지만, 여전히 내용 면에서 탁월한 앨범인 것은 틀림없다.

 

뮤지션이라면 이런 앨범 하나쯤 있어야지

 

검정치마는 2집까지는 미국을 오가며 작업했지만, 그 뒤로 한국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고 한다. 그는 “뮤지션이라면 음악 인생에 콘셉트 앨범과 더블앨범 하나쯤은 되지 않겠느냐”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6년이라는 긴 숙성 과정을 거쳐 세 개의 파트로 나뉜 연작 프로젝트로 3집을 발표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017년 공개된 [Team Baby]는 외롭고 애틋한 사랑을 테마로, 1집과 마찬가지로 일렉트로닉부터 레게까지 여러 장르에 발을 걸쳤다. 그는 “장르 욕심이 많다. 힙합이든 록이든 일단 만들면 한 곡쯤은 남들 이상으로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막상 만들고 보면 결국 의도와 상관없이 내 스타일처럼 들린다. 그게 음악적 한계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다만 [Team Baby]는 수록곡 하나하나가 지닌 매력과는 별개로, 전반적으로 매끄럽지만 예전 앨범들 같은 텐션이 부족하다고 느낀 청자도 많았다. 이 즈음 그의 결혼 사실이 알려진 것과 맞물려서, 개인적인 삶이 안정을 찾으면서 아티스트의 ‘엣지’가 무뎌진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검정치마는 “한 사람을 위한 헌정 앨범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로맨틱하겠지만, 그보다는 사랑 자체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앨범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부연했다.

 

2년 뒤의 두 번째 파트 [Thirsty]는 [Team Baby]와 여러 모로 대칭점을 이루는, 사랑의 어두운 면을 뻔뻔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이야기한 앨범이다. 스타일 면에서도 노이즈 가득한 기타가 자글거리는 거칠고 무거운 생기가 넘치는 사운드로 돌아왔다. [Thirsty]는 2020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모던록 음반을 십 년 만에 수상했다. 2021년에는 [Good Luck to you, Girl Scout]을 발표했는데, 이는 세 번째 파트가 미뤄진 것에 대한 서비스 성격의 EP로 대부분 집에서 녹음하고 수정을 최소화하는 홈메이드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2023년 [Teen Troubles]는 “1999년으로 보내는 러브레터”라는 설명처럼 그가 음악을 시작한 십 대 시절의 성장통을 돌아보는 자전적 성격이 강한 앨범이다. 수록된 18곡이 펑크, 신스팝, 로큰롤 등 지난 앨범들의 스타일을 모두 아울렀다. 이 앨범은 연작 프로젝트의 마침표를 훌륭하게 찍은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으면서, 2023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모던록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스스로 자랑스러운 앨범 다섯 장을 갖고 싶다.”

 

검정치마의 블로그 대문에는 ‘장거리 달리기’라는 뜻의 ‘distance runner’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는 “예전에는 명반 하나 내고 요절하는 식으로 살고 싶었지만, 2집을 기점으로 그런 판타지는 없어졌다”고 했다. “1집까지만 해도 빨리 치고 올라가서 정점을 찍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보니까 음악은 오래 달리기에 가깝더라. 단발성으로 타버리는 것보다는 오래 하면서 다작을 하고 싶다.”

 

검정치마는 “’레거시(legacy)’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남아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산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나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앨범 다섯 장을 갖고 싶다. 더 많으면 좋겠지만 일단 다섯 장이다.” 싱글 음원보다는 정규 앨범 중심으로 승부하는, 어찌보면 요즘 음악 시장에서 시대착오적인 전략으로 활동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하는 게 뭔지 좀 알게 된 것 같다.” 그는 이제 뮤지션으로서 완숙해질 나이인 사십 대에 들어섰다. 앞으로 검정치마의 행보는 좀 더 길게, 오래 지켜보면 흥미로울 듯하다.

 

 

[사진출쳐=벅스, 뉴시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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