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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7
by 최승우

1980s 이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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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0-17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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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는 마치 기타를 연구하는 학자 같은 이미지다. 듀오 ‘어떤날’로 두 장의 전설적인 앨범을 남겼고, 이후 클래식과 재즈, 록, 팝 등 광범위한 음악적 영역을 기타 한 대로 독창적으로 표현해왔다. 또한 천만 관객 영화의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영화음악의 ‘황금손’이기도 하다.

 

“음악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이병우가 처음 기타를 접한 것은 열한 살 때다. 그는 삼남매의 막내였는데,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누나와 형의 기타를 몰래 치면서 놀곤 했다. 그걸 본 어머니는 “기타가 좋으면 학원에 다녀보라”며 클래식 기타 레슨을 받게 했다. 정작 학원은 한두 달 다니다 흥미를 잃었지만, 기타를 혼자 갖고 노는 건 여전히 재미있었다. 그는 “그저 기타 소리가 너무 좋았다”고 돌아봤다.

 

중학교 때는 자연스럽게 일렉트릭 기타로 넘어갔다. 주한미군방송(AFKN)에 록 밴드들이 나와서 공연하는 게 멋있어 보였다. 학교에서 밴드를 결성해 친구들 앞에서 화려한 헤비메탈 연주를 펼치기도 했다. 이병우는 “음악에 완전히 빠져서 이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잘했으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겠지만, 책을 보면 이걸 왜 외우라는 건지 화가 났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이병우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무릎을 다쳐서 수술을 했는데, 어처구니 없는 의료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학교를 일 년 동안 쉬게 된 것이다. 우울하고 고독한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스스로와 대화할 시간이 넘쳐났고, 그 덕분에 음악과 더욱 가까워졌다. 록과 재즈, 장대한 교향곡까지 밤낮없이 들었고, 기타를 치며 작곡을 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음악을 마구 빨이들인’ 시절이었다.

조동익과의 만남, 그리고 전설의 듀오

 

이병우가 열아홉 살이던 1984년, 한 친구가 그를 서울 압구정동의 카페에 데려가서 누군가를 소개해줬다.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거목인 포크 뮤지션 조동진의 친동생이자, 베이시스트 겸 프로듀서인 조동익이었다.

 

다섯 살 차이의 조동익과 이병우는 팻 메스니(Pat Metheny)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등을 좋아하는 음악 취향이 잘 맞아서 금방 친해졌고, 같이 음악을 하기로 약속했다. 또 조동익 덕분에 이병우는 들국화의 최성원 등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조동익은 “이병우는 매력 만점의 사나이였다. 음악적으로도 서로 굉장히 통했고, 그가 만든 곡들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전설의 듀오 ‘어떤날’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병우와 조동익은 1985년 최성원이 기획한 옴니버스 앨범 [우리노래전시회] 1집에 ‘너무 아쉬워하지 마’를 수록하며 처음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팀 이름 어떤날은 조동익이 조동진에게 주었던 노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들국화의 데뷔 앨범에는 이병우가 작곡한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실렸다. 이병우는 “늦잠 자고 일어나서 그 상황을 그냥 한 번에 썼더니 노래가 되더라. 나중에 최성원 형이 듣더니 들국화 앨범에 넣고 싶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듬해 1986년 어떤날은 데뷔 앨범 [1960·1965]를 발표했다. ‘하늘’, ‘그날’, ‘지금 그대는’, ‘오후만 있던 일요일’ 등 이들의 음악은 어떤 장르의 범주로도 단순하게 분류하기 어려웠다. 단조로운 듯 쓸쓸하며, 동시에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은 국내에서 나온 기존 음악들과 표현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어떤날은 1987년 [우리노래전시회] 2집을 통해 ‘그런 날에는’을 공개한데 이어 1989년 2집을 발표했다. ‘출발’, ‘초생달’, ‘취중독백’, ‘11월 그 저녁에’ 등이 수록된 2집은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1집보다는 다채로운 형식미가 더해졌다. 그러나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두 사람의 성격상 별다른 홍보 활동이나 공연도 없었기에 대중의 반응은 미미했지만,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간간히 흘러나오며 소수의 팬층을 만들었다.

 

이후 어떤날이 남긴 두 장의 앨범은 재조명을 받으면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마스터피스로 남게되었다. 유희열, 김현철, 마이 앤트 메리, 델리 스파이스 등 이들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은 셀 수 없다.

 

그 뒤 이병우와 조동익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조동익은 최고의 베이시스트이자 작/편곡자, 프로듀서로 자리를 잡았다. 이병우도 기타 세션으로 점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공연보다는 스튜디오 세션을 지향했는데,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연주하지 않아도 되는 게 그 이유라고 한다. 공연을 자주 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기타를 연구하는 기타리스트

 

이병우에게 1990년대는 오로지 기타를 연구하고 파고든 시절이었다. 어떤날 2집이 나온 해 그는 첫 솔로 앨범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航海]을 발표했다. 기타와 기타 신디사이저만으로 작업한 이 앨범에서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음악적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어떤날을 통해 보여준 감수성, 많은 세션으로 다듬어진 기타 테크닉이 조화됐으며, 특히 기타 톤을 명징하면서도 따뜻하게 담아낸 레코딩이 돋보인 앨범이다.

 

1집 발표 후 이병우는 홀연히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그동안 스튜디오 세션을 많이 하다보니 연주보다는 시간 노동을 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자신의 내밀한 세계를 좀 더 확장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빈 국립음대에 합격한 그는 클래식 타리스트의 거장 콘라드 라고스닉에게 사사했는데, 당시 정원영, 한상원, 김광민 등 유학 1세대 뮤지션이 대부분 미국 버클리로 향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클래식을 전공한 뮤지션이 대중음악으로 영역을 넓힌 것과 달리, 대중음악에서 출발한 뮤지션이 정통 클래식 코스로 진입한 흔치 않은 사례인 셈이다. 이병우는 이 당시에 대해 “클래식을 공부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음악을 하는 것은 단순히 음만 연주하는 게 아닌 해석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유학 도중에도 이병우는 두 장의 앨범을 냈는데, 1990년 2집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하여], 1993년 3집 [기타 생각 없는 생각]이다. 기타 중심의 단촐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2집은 어떤날 시절의 음악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뚜렷한 기승전결보다는 제목 그대로 담백한 차 한잔을 마시는 듯한 섬세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반대로 조동익이 참여한 3집 [생각 없는 생각]에서는 밴드 편성으로 작업했으며 보다 다양한 장르와 연주 스타일을 넘나든다. 이전까지는 들을 수 없었던 리듬감 넘치는 연주까지 들을 수 있는 앨범이다.

 

1991년 양희은의 데뷔 20주년 데뷔 앨범 [양희은 1991]에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도 이병우의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번안곡 한 곡을 제외한 전곡의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양희은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바로 이병우의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병우의 기타와 양희은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이 앨범은 양희은의 가장 훌륭한 앨범이자 대중적으로도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1994년 빈 국립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병우는 이듬해 4집 [야간비행]을 발표했다. 네 곡의 자작곡과 세 곡의 커버로 구성된 이 앨범에서 그는 또 다른 시도를 했다. 악기 편성이나 전개 면에서 오히려 기타가 살짝 뒤로 물러난 인상을 주는데, 여기서 그려지는 풍경과 이미지는 이후 영화음악가로 성공하게 된 이병우의 감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뒤 이병우는 다시 미국 메릴랜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피바디 음악원 전문 연주자 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수료하고, 해롤드 랜돌프 상을 수상한 뒤 2000년 귀국했다. 이 즈음 그의 이름은 언론에서 뒤늦게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2001년에는 1천 석이 넘는 LG아트센터에서 이틀간 가진 공연이 순식간에 매진되기도 했다.

영화음악가 이병우

 

‘천부적 호기심’을 타고났다는 이병우에게 영화음악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의 첫 영화음악 작품은 지인의 소개로 맡게 된 1996년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다. 그 뒤 ‘그들만의 세상’, ‘스물넷’도 이병우의 손을 거친 영화다.

 

본격적으로 그가 영화음악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한 것은 2001년의 ‘마리 이야기’다. 흔치 않은 국산 장편 애니메이션인 ‘마리 이야기’는 준수한 작품성을 생각하면 아쉬운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뛰어난 영상미를 돋보이게 하는 이병우의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이병우는 ‘장화, 홍련’,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등 음악감독을 맡은 영화가 흥행하며 영화음악가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연애의 목적’, ‘왕의 남자’, ‘괴물’, ‘마더’, ‘관상’ 등이 그의 손을 거친 영화다. 동서양의 고전과 재즈, 록 등 그동안 쌓아온 방대한 음악적 스펙트럼은 영화음악 작업에 큰 무기가 되었다. 그는 “주로 혼자서 작업을 해온 탓인지, 영화음악은 어떤 틀 속에서 해야 한다는 게 오히려 힘이 덜 들고 재미있다”고 밝혔다.

 

영화의 주제를 간결하면서도 확고하게 귀에 꽂히게 하는 테마는 이병우 영화음악의 특징이다. 그는 클래식을 전공한 기타리스트답게 현악기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현악기는 저음부터 고음까지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끌어들인다. 그만큼 민감하고, 그 질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잘 맞아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 뒤 이병우는 국내에서 누구보다 바쁜 음악가 중 한 사람이 됐다. 영화음악 일이 밀려들면서 앨범 활동은 다소 뜸해졌다. 그가 2000년대에 발표한 앨범은 8년만에 나놓은 2003년의 5집 [흡수]가 유일하다.

 

“기타는 정말 끝내주는 악기”

 

이병우는 2013년 발달장애인이 참가하는 평창 동계 스페셜 올림픽의 예술감독으로 올림픽 무대와 부대행사 등을 총지휘했다. 그는 자신 역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안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에 관심이 많고, 관련 행사에 자발적으로 나선 경우도 많았다. 행사를 끝내고 나서 받은 돈도 전부 기부했다. 2010년부터는 성신여대 현대실용음악학과 교수로 강단에도 섰다.

 

그러나 이병우는 교수직을 맡으면서 그 뒤로 한동안 곤혹을 치러야 했다. 2016년 나경원 의원의 지적장애 딸 성신여대 부정입학 사건의 주요 인물로 거론된 것이다. 그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라며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해명 인터뷰를 했으나, 한동안 거센 구설수에 휘말리며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병우는 “총선을 앞두고 진영 간의 싸움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도 그는 2016년 13년 만에 여섯 번째 정규 앨범 [우주기타]를 발표했다. 특유의 서정성부터 다양한 실험, 초현실적이고 난해한 연주 등 이병우가 그간 보여준 음악 세계가 정리된 독창적인 사운드가 담긴 앨범이다. 이병우는 “기타의 한계에서 자유롭고 싶었다”며 팝과 클래식 사이에 있는 내 정체성을 비로소 확립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병우는 2014년 ‘국제시장’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영화음악과 거리를 뒀다. 진행 도중에 중단된 프로젝트도 있지만, 그보다는 ‘국제시장’의 너무 큰 성공이 부담이 됐다고 한다. 2018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음악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좀 더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2019년 교수직을 내려놓고 ‘전업 뮤지션’으로 돌아왔다.

 

이병우는 기타리스트 중에서도 기타를 유독 사랑하는 기타리스트다. 오로지 기타로 모든 걸 표현해온 그는 “기타는 정말 끝내주는 악기”라고 말한다. 여전히 음악감독이라는 타이틀보다는 기타리스트가 편하다는 이병우는, 당분간은 신곡보다는 기존 솔로 곡이나 영화음악 중 미발표 곡을 다시 작업하는데 집중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진출처=지니뮤직]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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