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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by 최승원

1970s 펄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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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17작성자  by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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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시스터즈는 배인순, 배인숙 두 자매로 구성된 여성 듀엣이다. 신중현 사단의 주요 그룹으로 일컬어지는 펄시스터즈는 당시 한국 대중음악 가요계에 만연해있던 트로트가 아닌, 록과 소울 기반의 ‘실험적’ 음악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166cm가 넘는 큰 키와 수려한 외모로 대중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뛰어난 가창력 실력까지 인정받았던 이들은 짧은 활동 기간임에도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신중현을 만나고 날개를 달다 


배인순, 배인숙 자매는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언니 배인순은 상명여중 3학년 재학 시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출전했던 수영선수 출신이다. 또한 고등학교 3학년 때 영어 웅변대회에서 동메달을 받았을 만큼 눈에 띄는 성량을 갖고 있었다. 동생 배인숙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웠고, 뛰어난 외모를 소유했다. 

 

성인이 되자 이들 자매는 그야말로 음악에 매진했다. 배인숙은 음악 활동을 위해 명지대학교 영문과에서 언니 배인순이 다니던 중앙대학교로 편입하기까지 했다. 이때 자매는 음악 학원을 함께 다니며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1967년, 한국 대중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인 미8군 무대 오디션을 통과한 펄시스터즈는 화양프로모션에 소속되었지만, 데뷔 무렵, 이렇다 할 팀명도 없이 무대에서 외국 팝송을 주로 노래했다. 1968년 1월,TBC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 <쇼쇼쇼> 출연을 계기로 펄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출연 후 한국 ‘카지노의 대부’이자 파라다이스 그룹창업주인 사업가 전락원의 눈에 들었다. 이후 펄시스터즈는 한국 공연 관광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워커힐 쇼’에 펄시스터즈가 소속돼 활동을 시작했다. 워커힐 쇼단 활동을 계기로 일본 공연을 다녀온 펄시스터즈는 최선희 무용 연구소에 들어가 안무 연습을 시작했다. 

 

펄시스터즈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던 것은 1968년,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을 만나고 나서다. 서른 살의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는 황제로 일컬어졌지만, 미8군 무대를 벗어나면, 트로트 음악에 익숙했던 당시 대중들에게 그의 음악 세계는 다소 전위적이었다. 당시 월남전 발발로 인해, 베트남 파병 그래서 음악적 탈출과 더불어 월남 위문공연을 위해 베트남으로 건너가 새로운 음악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뷔하기 전 1년간 신중현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던 펄시스터즈는 베트남으로 떠나려 했던 신중현에게 직접 작사, 작곡한 곡으로 기념 음반을 만들어달라고 간청하여 앨범을 발매한 것이 신중현의 음악 인생에 신의 한 수가 됐다. 

 

1964년 신중현의 애드 포 (Add 4)를 통해 발표했지만, 큰 반응이 없던 곡 ‘빗속의 여인’, ‘내 속을 태우는 구료’에서 제목을 바꾼 ‘커피 한 잔’, 시스터즈를 위해 작곡했던 ‘님아!’, ‘떠나야할 그 사람’ 등을 지도했다. 당시 팝 창법에 익숙했던 펄시스터즈는 본격적인 소울 뮤지션으로의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다. 1968년 12월 [님아!/커피 한 잔]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이 발매됐으며 앨범 부제는 ‘신중현과 펄-씨스터’였다. 

 

예상 뒤집은 역사적인 기록 

 

[님아!/커피 한 잔]을 제작했던 박성배 사장은 신중현과 펄시스터즈의 앨범 녹음 과정 당시 “절대 인기를 끌지 못할 괴상한 노래”라며 성공보다는 실패를 점치고 있었으며,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60년대 신중현이 시도했던 소울 음악 자체가 당시 한국에서는 다소 이질적이었던 탓에 비관적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비관적인 예상을 뒤집고 ’님아!‘와 ’커피 한 잔‘이 펄시스터즈의 최고의 히트곡이 되면서, 1969년 데뷔 1년 만에 대한민국 걸그룹 사상 최초의 가수왕을 거머쥐는 역사적인 기록을 써냈다. 이러한 엄청난 성공의 이면에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소울 음악을 한국의 정서로 재해석한 신중현의 작곡 능력과, 펄시스터즈의 소울 창법과 하모니가 젊은 대중들에게 깊숙하게 파고든 것이다. 

 

또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의 보급도 한몫했다. 166cm가 넘는, 당시로서는 꽤 큰 키와 청순한 외모, 짧은 바지와 원피스 위주의 개성 넘치는 패션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아 브라운관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게 됐다. 무엇보다 경직된 자세로 노래를 부르던 다른 가수들과 다르게 화려한 춤과 노래를 선보였던 그녀들이야말로 새로운 아이돌의 탄생이었다.

 

당시 월남전 파병으로 뭇 남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던 펄시스터즈의 비주얼과 음악은 그야말로 파격으로 다가왔지만, 너무 생소했던 소울과 록 음악이었던 탓에 일부 대중은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반응 역시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큰 인기를 증명하듯 신인 걸그룹임에도 불구하고, KBS 음악 프로그램 <패티김 쇼>에서 세 차례에 걸쳐 펄시스터즈의 특별 방송을 편성했다. 또한 CF와 영화 출연 제의가 물밀듯이 빗발쳤다. 출연료도 교통비 5,000원에서 무려 100배나 폭등한 50만 원까지 급상승하며, 거칠 것이 없는 스타가 되었다. 

 

펄시스터즈의 엄청난 성공은 단순히 음악뿐 아니라, 당시 청년문화도 바꿔 놓았다. 그녀들의 수려한 외모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비디오 시대를 개막하게 했고, 젊은 층이 주로 다니던 다방에서도 ’커피 한 잔‘이 흘러나왔다. 이러한 펄시스터즈의 대성공으로 신중현은 이른바 ’신중현 사단‘을 구성하여 히트곡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다. 

 

데뷔 1년 만에 발매한 베스트앨범 [펄 시스터 특선집]은 다채로운 록 사운드로 구성되어 있다. A면에는 “님아!”, “커피 한 잔”, “알고 싶어요” 등 총 6곡의 신중현의 창작가요와 B면에는 6곡의 번안곡들로 이루어졌다. 당시 라디오에서 주로 흘러나왔던 팝송 “Sanfrancisc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샌프란시스코에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White House (하얀 집)”, “Get Ready (준비하세요)”, “I Second That Emotion(내 꿈을 이뤄줘요)”, “Cry Like A Baby (왜 날 울려놓고)”, “Yesterday (지난날 그 시절)”들을 번안한 곡들이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작곡가 홍현걸의 [홍현걸 작곡집]과 가수 이정화와 함께 낸 앨범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 그리고 [펄시스터즈 스테레오 히트앨범], [펄시스터즈의 소울 크리스마스], [슬퍼도 떠나주마 – 박춘석 작곡집], [펄시스터즈의 새로운 노래] 등을 발매했다. ’커피 한 잔‘과 같은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며 국내 활동을 펼쳤고, 펄시스터즈는 세계무대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가수의 꿈을 접은 그녀들의 사연

 

가수왕을 거머쥐며 탄탄대로를 걷던 펄시스터즈는 펄시스터즈가 일본으로 떠난 이유는 음악적인 성장, 그리고 일종의 ‘탈출’을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에는 신중현을 제외하고 대부분 트로트 작곡가가 많았기 때문에 펄시스터즈가 하고자 하는 음악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딜레마에 빠져있던 펄시스터즈는 한국을 떠나 일본 활동을 꾀하게 된 것이다.

 

일본 활동을 하기 위해 먼저 ‘도쿄 국제 가요제’에서 ‘사랑의 교실’이라는 곡으로 본선에 진출하며, 일본 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후 1972년 매니저도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펄시스터즈는 ‘준과숙’이라는 이름으로 활동명을 바꾸고 소니뮤직과 2년 계약을 맺었다. 계약 후 가요 경연 대회인 ‘신주쿠 페스티벌’에서 ‘달에 젖은 꽃 (月に濡れた花)’이라는 데뷔곡으로 은상을 거머쥐며 화제가 되었고 일본에서의 첫 앨범 [하얀 가랑비의 이야기 (白い小雨の物語)]를 발매했다. 

 

앨범 발매 후 일본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73년 [준과숙 Super Hits (ジュンとシュク = Jun & Syuku* – スーパー・ヒット = Super Hits)]과 [님아 헤어진 그사람 (ニマ 別れたあの人)] 싱글을 발매했다. 슈퍼 히트 앨범에는 일본가요를 커버한 총 12곡이 수록되었다. 사실 펄시스터즈는 일본 활동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NHK를 비롯한 일본 스케줄이 모두 잡혀 있던 상황에서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이 성립되면서 억지로 한국에 불려가게 된 것이다. 당시 NHK 특성상 한번 스케줄을 취소하면 다음에는 섭외를 하지 않는 관행이 있어 일본 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1974년, 파라다이스 그룹 전락원 회장의 주선으로 그녀들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펄시스터즈는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했다. 펄시스터즈는 먼저 ‘게브리얼 루이즈 앤 밴드’의 미국 투어에 참여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라스베이거스와 뉴욕에 진출하여 활동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 독특했던 점은 1년간의 짧은 계약 기간 중 대학 공부와 3개월간은 별도로 음악 공부를 시켜준다는 조건도 함께 포함되어 있어 그녀들에게는 공연과 유학을 동시에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1976년, 언니 배인순이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과 돌연 결혼을 발표하면서 배인순도 함께 귀국했다. 사실상 펄시스터즈는 해체된 것이다. 

 

귀국 후 별다른 활동이 없던 배인숙은 1978년 고전 <배비장전>의 뮤지컬 무대인 <살짜기 옵서예>에서 6대 애랑 역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긴 시간이 흐른 만큼 소녀에서 숙녀로 이미지 변신을 꾀했던 그녀는 1979년 작곡가 안치행의 음반사인 안타 프로덕션에서 음반 두 장의 전속계약을 맺고 솔로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솔로 데뷔 음반 [누구도 그러하듯이]는 프랑스 가수 알랑 바리에르의 곡 ‘Un Poete’를 번안하여 수록했고 발라드 풍의 ‘그대 내 곁에 있어줘요’, 디스코 사운드의 ‘난 몰라’, 일본에서 유행하던 컨템포러리 팝 스타일의 곡 ‘오동잎’ 등 당시 유행하던 세련된 팝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솔로 앨범 발매 후 지상파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앨범 재킷의 촬영을 담당했던 사진작가 김중만의 패션쇼를 통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1980년 2집 [일요일의 고독 / 지금은 머물고 싶어]를 발매했지만, 1981년 미국 활동을 꾀하며 한국을 떠났다.

 

긴 시간 공백 이후 맞이한 황혼기

 

1991년 펄시스터즈의 컴필레이션 앨범 [오리지날 힛송 총결산집], [펄시스터즈 히트 전집] 이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 발매됐다. 90년대에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펄시스터즈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간간이 방송을 통해 근황이 전해졌다. 언니 배인순은 굴곡이 많던 결혼 생활과 아들과의 이른 이별 등으로 큰 고난을 겪기도 했다. 1998년 이혼 후 2003년 자전적 소설인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 잔>을 출간하며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모았다. 

 

배인순은 은퇴 33년 만에 첫 솔로 앨범 [커피 한 잔과 나의 노래]를 발매했다. 타이틀 곡이었던 ‘늦어서 미안해’는 자신의 자전소설을 통해 밝혔던 결혼에 대한 후회를 털어놓은 심정을 담은 곡이다. 소울 가수였던 펄시스터즈의 멤버였지만, 트로트 음반을 통해 다시 대중들 앞에 가수로서 다가가게 된 것이다.

 

배인숙은 언니 배인순의 이혼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별다른 활동을 선보이지 않았지만, 한 인터뷰에서 “당시 언니 배인순의 결혼으로 인해 펄시스터즈로서 마무리하지 못해, 다시 팀을 결성해 마무리를 제대로 짓고 싶다.“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2011년 40년 만에 펄시스터즈는 KBS <TV 50년쇼>를 통해 특별 무대를 선보였다.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은 김추자, 신해철 등이 리메이크하여 불렀으며, 당시 한국 소울, 사이키델릭의 선구자였던 신중현에 의해 끊임없이 회자 되는 곡으로 남게 되었다.

 

 

[사진출처 : MBN]

 

 

최승원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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